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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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 존엄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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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11-01 15:45 조회5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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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 참…. 인생 참…. 올케의 봉안당奉安堂으로 가는 길, 한숨 같은 탄식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올케가 떠난 지 1년, 그새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늦도록 맹렬한 기세를 떨치는 더위 탓에 그저 여름만 같더니 어느새 들판에 완연하게 내려앉은 가을빛이 세월의 속절없음을 새삼 일깨우고, 꿈결인 듯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올케의 부재不在가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참 많이도 고통스러워하더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떠나간 그곳에서 지금은 편안할는지. 그리움을 지우는 건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나 사느라 바빠서 잊고 지낸 날이 더 많지만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을 적시는이 애잔함은 언제쯤이나 옅어질지.


 앞집 우편함에 온갖 고지서가 넘치도록 쌓이더니 출입문에 그예 경고장 비슷한 문구를 담은 노란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우리 올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일이었으니 앞집 아주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도 1년이 넘었다. 우편물이 없어지는 것으로 봐서는 그래도 자식들이 한 달에 두어 번씩 빈집을 드나드는 것 같았는데 그마저도 두어 달 새 발길이 끊겼다. 하나둘 늘어나는 노란 딱지가 아주머니의 부고訃告 같아서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온갖 풍상을 다 겪느라 허리가 굽었다고 하면서도 나이 70세가 넘도록 황태 가공 공장에 다니던 부지런한 아주머니였다.


 노는 날이면 잔치국수 뚝딱 삶거나 부침개 넉넉하게 부쳐서 동네잔치를 벌이던 소탈한 아주머니였다. 몇 년 전 폭우에 우수관이 터져 우리집이 온통 물바다가 됐을 때도 자다 말고 맨발로 건너와 쓰레받기로 물을 퍼내 주던 인정 많은 아주머니였다. 그런 아주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온몸에 주렁주렁 무얼 달고 붙인 채 사경을 헤맨다니, 산다는 게 다 무언가 허망해지곤 한다. 생과 사의 경계가 종이 한 장 차이 같다는 생각에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이의 깨달음을 위해 45년간 전도의 여정에 올랐던 부처님께서 팔십 노구를 이끌고 고향으로 향하던 마지막 여행길에서 심한 병을 얻어 입멸에 이르게 되셨다. 부처님께서는 애통해 하는 상좌 아난다에게 “죽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도, 애달파 하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도 “존재하는 것은 모두 쓰러져 가는 것이니 부디 마음을 놓아 헛되게 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해야 하며 결코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거듭 이르셨다고 한다.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번뇌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꾸준히 수행하라는 말씀이겠지만 제자들의 슬픔이 컸던 것처럼 과연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누구나 무한할 것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한 것. 죽음을 초월하는 부처님의 그 깊은 뜻을 어찌 다 헤아리고 그 명징한 가르침을 어찌 다 따를 수 있겠냐만, 오늘도 여전히 세속의 강을 건너고 있는 얕은 내 속내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뒤돌아보라는 말씀으로 여겨진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봉안당, 높다랗게 안치되어 있는 올케의 유골함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자신이 선택한 대로 올케는 행복한 죽음, 존엄한 죽음을 맞이했을까.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앞집 아주머니와 달리 우리 올케는 일찌감치 등록해 둔 사전 연명의료의향서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했다. 20여 년간 간호사로 일하면서 임종에 이른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심폐 소생술을 받고, 혈액 투석을 하면서 생명을 연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다. 올케의 뜻에 따른 일이었지만 가족들의 결단에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은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일 뿐, 연명치료를 중단한 올케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러지듯 숨을 거두었다.


 웰 다잉(well dying)으로 지칭되는 아름다운 죽음, 편안한 죽음은 우리 모두의 염원이기도 하다. 최근 존엄사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존엄사란 의학적으로 최선의 치료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선택을 돕는 것이 2018년에 도입된 연명의료 결정법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라는 의사의 판단이 내려졌을 때, 환자의 의향을 존중하여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다. 임종 과정에 처한 환자가 됐을 때를 대비해 건강할 때 미리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향을 담은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위한 여러 가지 시술과 처치 중단을 결정해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9월 말까지 5년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도 198만 4,816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자신의 뜻대로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나 역시 이 제도가 시행되자마자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했다. 연명치료 중단을 두고 소극적인 안락사라는 여론도 없지는 않으나 아름답지는 못하더라도 추하지는 않게, 미련이 있을지 몰라도 짐이 되지는 않게, 그것이 존엄한 죽음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끼곤 한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그러나 생명의 소중함과 삶의 기쁨을 깨닫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웰 다잉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해 보는 죽음 연습은 가능하다. 온 마음을 다해 유서를 써 보고, 수의를 입고 관속에 누워 보고, 묘비명을 지어 보는 임종 체험을 하면서 언젠가는 당면하게 될 죽음을 만나보는 것이다. 나도 몇 년 전 임종 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꼈던 수많은 후회와 수많은 다짐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관 뚜껑이 닫히자 텅텅 들려오던 망치소리, 그리고 억겁의 시간 어디쯤일 것처럼 몰려들던 그 완벽한 고요함이라니. 수의 한 자락 걸치고 결국 그렇게 비좁고 어두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과의 단절, 그 깊은 어둠이 내게 준 것은 감사였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잊어야 할 것을 부여잡고 살았다는 회한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나의 속됨을 씻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연습이었으면 참 좋았을 것을. 꿈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앞집 아주머니도,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죽음의 문턱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을 올케도 부디 이제는 더이상 아프지 않고 편안하기를.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느라 상처 입은 나무가 텅 빈 공간에 작은 들짐승을 품어 안는 것처럼, 어느 곳에서인가 우리보다 더 깊은 슬픔을 끌어안고 있을지도 모를 수많은 영혼들에게 편지를 쓰듯, 우리 모두에게도 큰 위안이 될 부처님의 말씀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깨달은 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여일如一 하며, 삶과 죽음은 흐르는 강물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죽음에 대한 초연한 자세도 삶의 일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