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뜨락 | 어사 박문수 설화 속 여성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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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10-05 15:25 조회1,81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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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과 설화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문서적인 <한국구비문학대계 5-4>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설화인 어사 박문수 관련 구전문학에는 여성장애인이 등장한다. 박 어사가 팔도 암행을 하던 중 강원도 홍천을 갔는데 산길이 험준하고 해도 넘어가서 하루 머물 곳을 찾다가 단칸 부엌에 방 하나 있는 집이 보였다. 그곳에서 하루 묵을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절세미인이 물을 긷고 있었다.
박 어사는 젊은 여인에게 깊은 산속 인가人家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묻자 그 여인은 남편이 있으며 남편은 강원도 ‘엄씨’라고 했다. 박문수는 절세미인을 보고 남자로서 그냥 갈 수가 없으니 하루 저녁 동침을 하자고 말했는데, 여인은 좋다고 하며 산 위에 올라가 있다가 방에 불이 꺼지면 들어오라고 했다.
박 어사는 그 여인이 시키는 대로 방에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와 동침을 했는데 새벽에 동이 터서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니 박 어사가 봤던 절세미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 앞과 뒤가 불룩이 튀어나온 척추장애인이었다. 박 어사가 혼비백산하여 나가려고 하자 그 여성장애인은 박 어사의 도포자락을 잡았다.
그 여인은 절세미인의 시누이로 만석군 엄씨 집안 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글을 배운 천하문장가였다. 박 어사는 여인을 뿌리치고 나가면서 부채를 놓고 갔다. 그 여인은 그 남자의 성씨가 박가朴家라는 것 밖에는 몰랐다. 시간이 흘러 그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동네 아이들은 아들에게 어미는 곱사등이고 아비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호래자식이라고 놀려댔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가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박 어사가 남기고 간 부채에 박문수라는 사람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있었던 듯하다. 여인은 재산이 제법 되었기에 한양으로 가는 아들이 고생을 하지 않도록 노잣돈을 두둑하게 챙겨주었다.
한양으로 간 아들은 한 엿장수에게 박 어사의 환갑잔치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엿장수는 엿을 팔기 위해 안가는 곳 없이 전국을 다녔고, 엿을 사러 모인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통에 정보통이자 소식통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들은 박 어사의 환갑잔치날에 맞춰 찾아갔다. 평소에 가면 문도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착해보니 인심 좋게 걸인들도 먹이고, 스님들은 그집 앞마당에 자리를 깔고 대접을 받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박 어사의 환갑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어사 나으리, 한 청년이 이 부채를 갖고서 우리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고 합니다요.”
그렇게 박 어사는 청년을 만났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부채를 싼 도포자락을 펴서 박 어사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과거 여인이 박문수를 못가도록 붙잡다가 찢어진 도포자락이었던 것이다.
“우리 외가는 강원도 엄씨요. 우리 어머니는 안팎 곱사등입니다.” 박 어사는 곱사등이라는 말에 그 여인을 바로 떠올렸다. 박어사도 항시 그 여인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사 박문수는 무려 19년 만에 아들을 만났다. 당시 박문수는 딸만 셋을 두었기에 대가 끊길 뻔 했으나 여성장애인 덕분에 대가 이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 아들이 결혼 후 아들을 8명이나 두게 되어 집안이 번성하게 되었다.
환갑잔치를 하고 3년 후인 1756년, 박 어사는 6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아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하였으나 결론적으로 장애여성과의 하룻밤이 헛되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어사 박문수는 조선시대 인물 중 구전설화가 가장 많이 전해지는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놀랍게도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 박문수가 등장하는 설화는 무려 97건이나 되는데, 이는 박문수가 그만큼 서민들과 가까이 하며 소통했음을 뜻한다.
『아함경』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제자들이 자신이 들은 부처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듯이,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문학도 전혀 근거 없는 일은 아니다. 구전문학에서 장애여성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장애인 포용 사회의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