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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 [속담으로 보는 불교] 미모는 가죽 한 꺼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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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7-31 15:20 조회7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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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모는 가죽 한 꺼풀.’ “Beauty is but skin deep”이라는 영어 속담의 우리말 번역이다. 잘생긴 남자든, 아리따운 여인이든 채 5mm도 안 되는 얼굴 가죽 한 꺼풀만 벗기면 흉측한 해골이 드러난다. 화상만 입어도 얼굴이 모두 망가지면서 옛 모습이 사라진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매일 닦고 씻고 바르고 꾸미는 얼굴인데 참으로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길을 걷다가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친구라고 확인되면 악수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우리나라 5천만, 아니 전 인류 78억명이 모두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을 달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헷갈리지 않고 내 가족이나 친구를 정확히 짚어낸다. 간혹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닮은 사람을 발굴하여 TV에 등장시키지만, 혼동할 정도로 같은 사람은 없다. 대뇌피질 하부에서 얼굴 인식을 담당하는 방추이랑(Fusiform Gyrus) 영역의 놀라운 감별력이다.


 불전에서는 우리의 심신이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색은 나의 육신이고, 식은 마음이며, 수, 상, 행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세부적인 심리작용들이다. 수는 느낌, 상은 생각, 행은 감성이나 의지를 의미한다. 우리의 육체인 색도 무상하고, 고락의 느낌인 수, 생각인 상, 감성이나 의지인 행, 그리고 마음인 식 모두 무상하다. 항상 변한다. 이렇게 변하기에 오온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자아가 아니고非我, 그 어떤 것에도 자아가 없다無我.


 외모는 오온 가운데 육신인 색의 일부다. 우리의 외모는 상처가 나도 달라지고, 화상을 입어도 망가지고, 나이가 들어도 변한다. 따라서 나의 외모가 진정한 나일 수 없고, 나의 외모에 진정한 내가 존재할 수 없다. ‘미모는 가죽 한 꺼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 즉, “그 어떤 것에도 자아는 없다”는 가르침의 편린이다.


 우리는 얼굴에 배치된 이목구비의 위치를 보고서 예쁘다거나 잘생겼다고 말하지만, 진화생물학적으로 볼때 이목구비의 원래 역할은 먹이 탐지와 관계가 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얼굴에 눈과 코와 혀가 몰려 있는 이유는 먹이가 들어가는 ‘입’ 주변에 포진한 탐지기이기 때문이다. 눈은 멀리 있는 먹이의 모습을 포착하는는 ‘원격 광학탐지기’이고, 코는 가까이 가져온 먹이의 성분을 탐지하는 ‘원격 화학탐지기’이며, 혀는 목구멍으로 삼키기 직전에 먹이의 화학성분을 최종 검사하는 ‘근접 화학탐지기’일 뿐이다. 눈과 코와 혀의 3단계 검토를 통과해야 먹이를 비로소 목구멍으로 넘긴다. 우리는 남의 눈매와 콧날과 입의 모습을보고서 그 사람의 미모를 판단하지만, 얼굴 가죽 한 꺼풀에 배치된 이목구비의 원래 용도는 이러한 먹이탐지에 있다. ‘미모는 가죽 한 꺼풀’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이목구비의 용도를 상기하면 굳이 그 가죽 한 꺼풀을 벗기지 않아도,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미추가 사라진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인간의 모든 얼굴 모습은 ‘먹어야 생존하는 가련한 중생’의 모습일 뿐이다.


『청정도론』을 보면 여인이 웃을 때 그 이빨과 연결된 해골을 떠올려서 역겨운 마음을 내어 아라한과에 오른 비구스님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인의 얼굴에서 가죽을 걷어내는 일종의 ‘상상想像 실험’이었다. ‘미모는 가죽 한 꺼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