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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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 업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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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7-31 14:26 조회7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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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마 니까야(중아함경)』에서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중생은 자신의 업을 가지고 있다.” 우리 중생들은 업으로 인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것들은,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업의 작용으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업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어로는 까르마(karma)라고 하고 빨리어로는 깜마(Kamma)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지 작용을 업이라고 한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그것이 업이다.”


 업은 도덕적 인과의 법칙입니다. 업이라는 것이 없고 그 과보가 없다면 세상은 너무 엉터리로 굴러갈 것입니다. 우리가 윤회를 거듭하는 것은 업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업과 윤회는 모두 불교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업과 윤회의 개념은 붓다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인도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도 전통의 업에 대한 개념은 숙명적인 것이며 계급 제도에 사람들을 얽어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인도에서는 너가 업을 잘 못 지어 하천한 계급에 속해 있으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너가 하는 일에만 전념하여 너의 업보를 씻어야 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 왔습니다. 지금도 인도 사람들은 잘못된 업에 대한 생각으로 계급 제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업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완전하게 만든 것은 부처님이었습니다.


 불교는 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해탈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의하여 업의 굴레를 벗어버린 부처님과 아라한은 업의 간섭을 받지 않습니다. 어둡고 칙칙하며 숙명적인 업에 대한 개념을 불교에서는 밝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업의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업이라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업은 자기의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지어진 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나쁜업에는 괴로움을 당하는 나쁜 결과가 따라오고 좋은 업에는 즐거움이 따라 옵니다. 이것을 선인선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은 업은 자기가 반드시 그 결과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자작자수自作自受,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합니다. 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배제되고서는 불교를 말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제 각각입니다. 우선 태어나는 배경부터도 차이가 큽니다. 흔히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것만 봐도 엄청난 불평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복한 집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하고 순탄한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거나 어려운 집에 태어나 어둠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데 비하여 어떤 사람은 보잘 것 없고 추한 용모를 가지고 태어나 평생을 기를 못 펴고 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뛰어난 두뇌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그것으로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이나 기형아로 태어나 평생을 불우하게 보내기도 합니다. 인류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불평등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불평등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불평등에는 확실한 원인이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불평등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런 불평등이 아무 원인 없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모든 것은 자기들의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다 자기들의 신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종교에서는 태어나면서 부터의 불평등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선천성 기형아나 불구자를 보고 하는 말이 기껏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대하여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잔인한 짓입니다. 그러나 지혜 있고 현명한 사람은 이러한 불평등을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단편적인 눈으로는 그러한 원인을 유추해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업이라는 것은 방금 전에 저지른 것도 포함되지만 그전의 생, 혹은 그 전전의 생에 지은 것도 포함됩니다. 지혜가 있고 깨친 사람은 그러한 과거의 업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능력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대다수의 인류는 이러한 불평등을 창조주의 의지와 같은 하나의 원인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거나 우연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불평등을 우연이나 조물주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의 불평등을 조물주나 우연에 돌려버린다면 굳이 착하게 살 필요도 없고 도덕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면 업에 따른 인과와 윤회전생轉生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