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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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 삼보귀의三寶歸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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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5-31 14:27 조회8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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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 귀의하는 첫걸음은 삼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삼보三寶는 불·법·승을 일컫는데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보배와 같다는 의미에서 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佛’은 깨친 이를 의미하는 ‘붓다(buddha)’를 한자로 음을 따서 불타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불타를 줄여서 불이라고 한 것인데 부처라는 우리말도 불타라는 한자에서 유래한 것 입니다. 부처는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또한 끝없이 무한한 자비원력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원만히 깨달은 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불을 자각각타自覺覺他가 원만한 분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란 참된 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남들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분을 받들어 모시며 닮아가겠다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귀의를 나타내는 불보에 대한 찬탄입니다. ​‘법法’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dharma)’라고 합니다. 법이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있습니다. 사회 규범으로서의 법이라는 말도 있고 어떤 일을 하는데 기준이 되는 것도 법이라고 합니다. 불교철학에서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불법승 삼보에서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진리 교법인 팔만대장경도 법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 따라 수행하여 진리를 증득할 수 있고 구경의 해탈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귀의 가운데에서 ‘자귀의법 당원중생 십입경장 지혜여해自歸依法 當願衆生 深入經藏 智慧如海’라는 법보에 대한 귀의를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오니 마땅히 중생으로서 경장에 깊이 들어 지혜가 바다같이 넓어지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인데 경장은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으로써 이를 통하여 지혜가 무한히 넓어지며 마침내는 열반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보라고 합니다.


 ‘승僧’은 산스크리트어 ‘상가(Samgha)’의 음역으로 ‘화합하는 무리和合衆’라고 의역됩니다. 한자로는 승가僧伽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승가라고 하면 머리 깎고 출가한 스님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래는 출가한 스님들 뿐 아니라 재가 신도도 포함하여야 완전한 승가가 됩니다. 즉, 비구와 비구니, 남자 신도인 우바새, 그리고 여자 신도인 우바이의 4그룹을 모두 일컬어 승가라고 했습니다. 이 4그룹이 바로 사부대중이라는 것인데 서로 이끌고 받들면서 잘 굴러가야 참된 승가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사이엔가 출가승들만이 절을 지키다 보니 승가라고 하면 출가한 스님의 집단만을 일컫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의 승가, 즉 상가는 화합중이라는 의역에서 보듯이 출가한 스님들은 불법을 잘 공부하여 재가 신자들을 가르치고 이끌며 재가 신자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보시로써 스님들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면서 화합하던 집단입니다. 이런 관계가 화합으로 잘 유지되어야 진정한 승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나오는 삼귀의게에 ‘자귀의불 당원중생 통리대중 일체무애自歸依佛 當願衆生 通理大衆 一切無碍’라는 것이 있는데 뜻을 풀이하자면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오니 마땅히 원하건대 대중과 잘 소통하고 화합하여 일체의 장애가 없어지기를 서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총지종이나 진각종에서 총무원에 해당하는 부서를 통리원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화엄경에 나오는 삼귀의게의 승보에 대한귀의를 나타내는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종단 종조이신 원정대성사님께서 약간 세속적인 총무원이라는 말 대신에 통리원이라고 이름 붙이신 것은 참으로 탁월한 식견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통리원의 역할은 모든 구성원을 잘 소통하게 하여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합의 무리를 의미하는 상가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화합은 승단 건립의 기초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6가지를 들어 어떻게 화합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주로 출가승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승가의 화합을 위한 매우 귀중한 지침서입니다.


(1) 견화동해見和同解는 같이 모인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공동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화합할 수 없습니다. 같은 종지를 지니고 불교의 발전을 위하여 같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2) 계화동수戒和同修는 법제상으로 사람마다 평등해야 하는 것으로 승가내의 규율의 통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승가의 규율은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화합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 이화동균利和同均은 경제상으로 분배가 골고루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 받은 시주물이 공평하게 나누어지고 공정하게 쓰여야 합니다.

(4) 의화동열意和同悅은 정신적으로 뜻이 맞고 의기투합해야 사람들이 기뻐하며 마음의 열림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5) 구화무쟁口和無諍은 언어상으로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언어상의 친절을 말합니다.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말로써 승가의 화합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6) 신화동주身和同住는 행위상으로 남을 침범하지 않고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위가 있다고 거만하고 갑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승가의 화합을 깨는 사람입니다. 승가에서의 직책은 불교를 널리 알리고 지키기 위하여 맡기는 직책인데 이를 착각하여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으스대면 이것 또한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중 벼슬은 닭 벼슬보다도 못하다는 속담이 바로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 승가는 화합의 바탕 위에 수행으로 몸과 마음을 닦아 보리를 얻게 하는 큰 용광로와 같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을 모시던 아난다가 승가의 화합된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부처님에게 “부처님! 이러한 도반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불도의 절반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했더니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화합된 도반들과 함께 하는 것은 불도를 다 이룬것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합하는 승가는 이처럼 우리가 열반을 증득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므로 승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교주인 부처님과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인 법, 그리고 이를 믿고 따르며 법을 지키는 승가의 세 가지 모두를 보배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삼보는 우리가 지혜를 얻어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연이기 때문에 하나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좋은 의사이고 법은 오묘한 약이고 승가는 환자를 돌보는 병원과 같아서 병을 앓는 환자에게는 세 가지 인연이 동시에 갖추어져야만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불·법·승의 세 가지 힘이 합쳐져야만 괴로움을 극복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자재한 해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승을 삼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