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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 인과因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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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10-31 13:16 조회9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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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도들은 누구나 인과因果라는 것을 믿습니다. 인과는 인연과보因緣果報의 준말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이 인과라는 말의 뜻입니다. 인과를 부정한다면 그는 불교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좋은 인을 지으면 좋은 과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시 등의 좋은 인을 만들어서 좋은 과인 복을 받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선인낙과, 악인고과善人樂果, 惡因苦果라는 말입니다.


 좋은 인을 만들면 기쁜 결과가 생기고 나쁜 인을 지어 놓으면 괴로운 결과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인선과, 악인악과善人善果, 惡因惡果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학술적으로 잘못된 말입니다. 과 자체에는 착하고 나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는 그저 인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인낙과, 악인고과’ 라고 해야 바른 말이 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을 믿고 신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인과를 무시한 기적도 일어나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자기가 지은 것에 따라서 자기가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선한 인을 지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을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 ‘인과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할까?’ 라고 의심을 합니다. 나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는데도 여전히 어렵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쁜 짓만 골라 하는것 같은데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으니 도대체 인과라는 것이 정말 있기는 있는지 의심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누구의 뺨을 한 대 때렸더니 조금 있다가 다른 누군가가 와서 나의 뺨을 한 대 때린다면 ‘흠, 이것이 인과로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내가 누구에게 돈 백만원을 좋은 일에 쓰라고 줬더니 다른 누군가가 금방 나에게 백만원을 가져다준다면 ‘인과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인색하고 노랭이 소리를 듣는 사람이 돈은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욕심이 적은 사람은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기도 합니다. 인격도 안되고 실력도 안되고 뻔뻔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아 큰 소리를 치고 있는데 정말 존경 받아야 할 사람은 이런 사람들에게 치여서 울분을 삭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사람들은 인과를 믿지 않게 됩니다. ‘인과라는 건 없어. 그냥 나 편리한 대로 살면 돼.’ 라고 생각하면서 나쁜 일도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저지르고 맙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과를 무시하고 욕심이 나는 대로, 화가 나는 대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인과라는 것을 믿는다면 겁이 나서도 나쁜 일은 절대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과의 진리를 무시하고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과의 진리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인과라는 것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인과라는 말은 인연과보因緣果報라는 말의 준말이라고 했는데 이말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인과를 말할 때 잘 잊어버리는 것이 ‘연緣’이라는 말입니다. 인이 직접 원인이라면 연은 간접 원인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면, 호박씨를 밭에 심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같은 호박씨를 심어도(정확하게는 비슷한 호박씨를 심어도) 어떤 것은 큰 호박이 되고 어떤 것은 작게 열립니다. 심지어는 어떤 것은 싹도 못나고 썩어버리기도 합니다. 같은 호박씨를 심어도 거름이 잘 주어졌는지 햇빛이 잘 들었는지 물은 잘 받아먹었는지에 따라서 호박의 크기와 질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벌레나 새가 호박씨를 먹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즉, 호박씨가 직접 원인인 ‘인’이라면 거름이나 햇빛, 수분 등의 간접 원인이 호박의 상태를 결정하는 ‘과’가 됩니다.


 세상사도 그렇습니다. 어떤 원인이 주어져도 거기에 따른 연이 어떠냐에 따라 그 결과가 금방 나타나기도 하고 천천히 나타나기도 하며 그 나타나는 모습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과의 바른 모습을 잘 살피지 못하고 인과에 대해 의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만사수연萬事隨緣’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좋은 인을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연을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좋은 연을 만나 훌륭한 학자나 발명가가 되기도 하지만 아주 나쁜 연을 만나 사기꾼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좋은 친구를 만나느냐 나쁜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진로가 많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자들이 절에 나와서 착한 도반들과 어울려 법담을 나누며 서로 다독거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복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좋은 연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인과의 이치가 잘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사의 불공평을 바라보면서 잠시 인과의 진리를 잊어버린 채 나쁜 생각이 날 때는 <담마빠다>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음 구절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자도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익으면

악업의 과보에 괴로워한다(119)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선한 이도 괴로움을 겪는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익으면

선업의 결과에 즐거워한다(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