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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 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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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8-27 12:07 조회3,2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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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눈

 

이번에는 될까, 다음번에는 되겠지 하면서 한 달 가까이 발바닥에 티눈 밴드를 붙이고 지내는 중이다. 밴드에 붙어있는 특정 약제의 작용으로 각질처럼 부풀어 오른 티눈 부위를 조금씩 제거해 내고, 같은 과정을 여러 차례 거듭하다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티눈 뿌리까지 뽑아낼 수 있다는 설명과 달리 자가 시술(?)은 아직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갑갑한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티눈을 모시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점점 더 커진다. 어느 날 갑자기 딱딱한 이물감과 함께 약간의 불편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티눈이라는 녀석이 밴드 하나를 붙이고 나자 이제는 온 신경을 제 쪽으로만 쏟으라고 아우성이다. 발바닥이 아픈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하게 되고, 절뚝절뚝 걷게 되고, 그러다 보니 다리며 발목도 당기고, 허리에 통증까지 느껴진다. 티눈으로 인해 발과 다리, 허리가 저마다 나 여기 있소~ 하고 소리치는 것 같다.

 

가슴을 옥죄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나타나는 호흡 곤란이 심장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듯이 이렇게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파야 비로소 느껴지는 게 우리 몸이다. 그러니까 어디든 몸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오장 육부가 어디 붙었는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 구석구석 모르고 사는 게 건강의 증표일 수도 있겠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전염병 경보단계 중 최고 위험 등급인 팬데믹(pandemic)에 빠진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바이러스가 인종 불문, 78억 명에 육박하는 세계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전까지 중국의 우한이라는 도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2백여 개가 넘는 나라와 영토에서 2천만 명에 가까운 확진 환자가 발생하기 전, 몰도바, 코소보, 부르키나파소 같은 나라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낯선 이름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위기에 처한 지구촌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 몸이 그런 것처럼, 코로나19가 그런 것처럼, 최고의 강수량을 기록하며 연일 물 폭탄을 퍼붓고 있는 우리나라 곳곳의 홍수 피해 현장도 그렇다. 어느 곳에서는 산사태가 일어나 주택을 덮치고, 물바다가 된 어느 곳에서는 건물이 침수되고, 또 어느 곳에서는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일어났다. 제방이 무너지고 농경지가 쓸려 나가고 도로가 끊겼다. 무리한 개발과 치적 쌓기에 급급했던 날림공사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한 강압, 위선, 조작, 부정부패 등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배신감과 분노를 안겨 준 이름도 적지 않다. 비만을 걱정하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춥고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한 쓰라린 이름도 있다. 악랄하고 교묘해지는 각종 범죄와 사건사고는 물론, 생태계를 파괴하고 우리네 건강을 좀먹는 환경 호르몬과 오염 물질의 이름도 새롭게 떠오른다.

 

티눈 밴드를 붙인 발바닥처럼, 코로나19로 알게 된 지구 저편 낯선 나라들처럼, 거센 흙탕물이 범람하고 낙석과 토사가 쏟아져 내린 그 마을에, 그 산비탈에, 그 강어귀에, 그 길가에 안전을 위협받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몰랐으면 더 좋았을 일이다. 티눈이 박이지 않았더라면 발바닥에 별다른 관심을 가졌겠는가. 코로나19가 생기지 않고, 폭우가 쏟아지지 않았더라면 그런 나라가 있었는지, 그런 동네가 있었는지도 몰랐을 텐데.

 

모르고 지나갔으면 더 좋았을 일, 관심 밖의 일로 흘려버렸으면 좋았을 일이 너무 많다. 발각되거나 발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존재 자체가 아예 없는 무의 상태인 모르고는 얼마나 평화롭고 안온할 것인가.

 

사전에서는 티눈을 일러 손과 발 등의 피부가 기계적인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작은 범위의 각질이 증식되어 원뿔 모양으로 피부에 박혀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니 티눈 입장에서야 억울하겠지만, 지나친 자극이 만들어낸 일종의 돌연변이인 셈이니 굳이 침소봉대針小棒大하자면 과유불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코로나19나 폭설폭우폭염태풍해일지진황사 등 날로 극심해지는 자연재해, 공공연한 비밀로 행해지고 있는 가진 자의 횡포, 불공정과 불평등의 수레바퀴에 치여 퇴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서민의 삶 역시,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되새기게 한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지금 우리 앞에 닥친 불행이나 비극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뿌리내리고 있다. 의도치 않았으나 지나친 피부 자극이 티눈을 만들어낸 것처럼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많이 편해지고 싶고, 더 많이 누리고 싶은 온갖 욕망이 재앙을 부르고 재난을 만들고 비극을 낳았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욕심과 욕구가 문명과 과학의 발달과 발전을 이끌어냈지만 이 또한 과유불급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채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달콤함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인간의 욕심은 물오른 나뭇가지처럼 자라나 사방팔방으로 촉수를 뻗친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과한 욕심으로 파멸을 자초한 일이 얼마나 많으며, 공든 탑을 무너뜨린 이는 또 얼마나 많은지. 입이 써서 말하기 싫을 뿐, 눈 달리고 귀 달린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티눈 밴드를 갈아붙이다 보니 티눈이 생기기 전 발바닥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집안이 조용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것처럼 나라가, 전 세계가 조용해야 평온하고 평화롭다. 떠들썩한 일, 요란한 이름쯤 모르고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비가 쏟아진다. 갑남을녀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욕심을 근심하는 사람은 적다.”라는 중아함경의 말씀을 안부 인사처럼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