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 | 선행(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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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1-27 13:26 조회4,09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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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善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나는 배낭 하나 질끈 매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저… 일자리를 구하는데요.” “일이 없는데.”
촌티를 벗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로 일자리를 찾아 헤맸지만 가는 곳마다 나이가 어리다, 기술이 없다 등 이런저런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열두 번도 넘게 실패한 뒤 배고프고 목마르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탈진해 주저앉아 있을 때, 작은 인쇄소의 구인광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될까? 안 될 거야. 그래도 가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인쇄소를 찾아갔습니다.
“저… 사람을 구한다고.” “그 기운에 뭔 일을 하려고?”
내 몰골을 보고는 일이고 뭐고 기운부터 차리라며 국밥 그릇을 밀어준 인쇄소 아저씨. 그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난 천사였습니다. 나는 인쇄소 찬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먹고 자며 일을 배웠습니다. 실수도 하고 고달플 때도 많았지만 이를 악물로 견뎠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뒤 첫 월급을 타게 됐습니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난생처음 내 손으로 번 돈이라 감개무량했습니다. 나는 수중에 라면 한 상자 값만 남기고 그 돈을 몽땅 저금했습니다. 고정불변의 저녁 메뉴 라면! 나는 배가 고플 때면 저금통장을 꺼내봤습니다. 통장에 불어난 돈을 보며 라면만 먹어도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렇다고 저녁을 굶을 수는 없기에 그날도 라면 하나를 축냈습니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날 일어났습니다. “어, 이상하다?” 하나만 남아 있어야 할 라면이 두 개였던 것입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라면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비밀의 열쇠는 주인아저씨 손에 있었습니다.
“박군아, 이거 말이다. 저 삼거리 빌딩 있지? 관리실에 갖다 줘라.”
아저씨는 저녁 무렵 일부러 심부름을 시키고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상자에 라면을 채워 넣으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고학생의 자존심이 다칠 것을 염려해 몰래몰래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깊은 사랑과 마술상자 속 라면이 있어 내 젊은 날은 초라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tv동화 행복한세상-이상한 라면상자 中>
‘그 깊은 사랑과 마술상자 속 라면이 있어 내 젊은 날은 초라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 한 줄이 참 오래도록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가난했던 한 청년의 젊은 날을 초라하지 않게, 또 가난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든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적은 돈으로 어디서나 살 수 있는 라면 한 봉지인 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게끔 한다. 물론 그냥 라면 한 봉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 라면 한 봉지를 상자에 매일 넣어놓은 아저씨의 마음이, 그 따뜻함이 청년의 삶을 초라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누구나 살아오며 한 번쯤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려움을 겪었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특히 물질적으로 어려울 경우에는 선뜻 다른 이에게 나의 어려움을 말 할 수 없어 더욱 곤란했으리라. 이런 순간에 나에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 일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사람,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선행이라고 하면 연말, 연초 뉴스 등을 통해 꽤나 큰 금액을 사회 내 약자에게 기부한 익명의 천사 등을 떠올리고는 하는데 물론 그러한 기부 등이 선행에 포함되고 좋은 일임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런 물질적인 기부만이 선행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선행을 거창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 글에서처럼 상대에게 그 순간 정말 필요했던 것, 혹은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는 것, 또 내가 하는 그리고 하려는 행동이 과정이나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그 또한 모두 선행이라는 것이다.
선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선행을 했다는 것을 티내거나 생색내지 않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내가 이 사람에게 이렇게 했으니 다음에 내가 어려울 때 이 사람도 나를 도와주겠지’라거나, 혹은 타인의 칭송을 받고자, 나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등 그 어떤 보상을 바라고 선행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내가 좋은 마음을 일으켜 선한 행함을 하였으면 그것으로 끝내고 뒤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내가 굳이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아도, 행(行)은 메아리와 같아서 내가 악행을 하면 악행이, 선행을 하면 선행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니 행하는 순간에 있어서는 그 무엇도 바라지 말고 그저 행함으로 끝내라. 그 결과는 알아서 돌아오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