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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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종50년특별기고 | 불꽃처럼 일어난 창종의 열망 그리고 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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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8-31 21:03 조회3,4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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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일어난 창종의 열망 그리고 불교총지종

 

준제법에 대한 연구와 실수를 마치다

원정대성사는 밀교는 의식(儀式)을 중요시하며, 사교이상(事敎二相)이 분명하고 정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밀교의 진언(眞言)과 인계(印契) 등 밀교의 의궤와 조직을 엄격히 하고 체계화하기 위하여 진각종 내의 모든 역경(譯經)이나 저술을 비롯하여 교상판석과 사교이상을 몸소 정립하려 했다. 그러던 중 원정대성사는 진각종의 교상과 사상 가운데 불합리하고 불명확한 점이 더 굳어지기 전에 보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궤정립을 위한 불사에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제에 일본불교대표단의 지적은 준제법 발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밀교의 올바른 수행법을 알지 못하고 오직 육자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의 염송과 이른바 심공에 의지하여 자신의 체험담을 교도들에게 들려주던 수준에서 탈피하고자 준제법에 대한 연구와 실수(實修)를 마친 후, 1971년 마침내 이의 시행을 종단에 건의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중요한 작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통밀교의 정립을 위하여 애쓰던 성사를 따르고자 하는 대부분의 승직자와 교도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밀교에 대한 생소함과 이해부족, 기득권의 종교외적인 곡해로 인하여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 종조 때부터 시행해 오던 비로자나불의 결인에 관세음보살의 진언으로 염송하던 수행법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고집했다. 회당조사의 재세시에 시행했던 것은 무조건 옳다고 여기고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못함으로써 정법을 외면한 일이었다. 이것은 신흥종단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정통밀교종단으로 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애석한 사건이었다.

길고 길었던 조선조(朝鮮朝) 5백년간 거의 빛을 잃고 흔적도 없었던 밀교가 원정대성사의 손에 의하여 잊힌 비법(秘法)과 경궤(經軌), 다라니(陀羅尼)와 수법(修法) 등이 발굴되면서 그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찰나 이러한 좌절은 한국현대밀교의 크나큰 비상을 가로막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준제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진각종은 연일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교리적으로는 불합리하나 회당조사 때에 제정한 기존의 법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준제법의 채택으로 정통밀교의 정립을 모색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종단은 두 파로 나뉘어 각자의 주장을 팽팽하게 펼쳤다. 종단의 동요는 심각한 분종의 사태까지도 우려되었다. 처음에는 원정대성사의 합리적 설명에 수긍하던 많은 승직자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존체제에 안주하는 양상을 보였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 개탄

이에 원정대성사는 이십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진각종을 회당개조(開祖)가 입멸하신지 불과 십 년 만에 교각살우(矯角殺牛:쇠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임)의 어리석음을 범할 수 없다고 개탄하고, 그해 12월 진각종 총인직을 비롯한 모든 직책의 사퇴를 선언함과 동시에 회당조사의 영전(靈前)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진각종을 떠났다. 종단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종적마저 감추고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생을 걸고 중생구제의 큰 서원을 세웠던 불퇴전(不退轉)의 의지가 어찌 그로써 끝날 수 있었을까. 원정대성사께서는 197211일 새벽을 기하여 영등포구 상도동 은거(隱居)에서 정순(正純)하고 완벽한 밀교종(密敎宗)의 창종을 위한 정법체득(正法體得)의 백일정진에 들었다. 백일정진이 끝나는 47일 밤, 한 백수노인(白首老人)으로부터 금관을 받았으며, 그 이튿날 밤에는 한줄기 서광과 함께 노인으로부터 대승장엄보왕경(大乘莊嚴寶王經)과 준제관음법(准提觀音法)으로 교화(敎化)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원정대성사는 이것이 관세음보살께서 꿈에 나타나시어 중생의 고난을 없애고 그들의 바램을 만족시켜 주라."는 가르침을 널리 나타내 보이신 것임을 활연(豁然)히 깨닫고 곧바로 교상확립(敎相確立)에 착수하였다.

 

비로자나부처님을 교주로 기틀을 갖춰

우선 정통밀교 종단임을 표방하기 위하여 비로자나부처님을 교주로 모시고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대승장엄보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교리적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에 의거하여 육바라밀에 의한 대승보살도의 실천을 완성할 수 있도록 교리의 기틀을 갖추었다. 여기에 교화의 방편으로서 준제법을 주축으로 삼고 증익(增益)식재(息災)경애(敬愛)항복(降伏)법 등의 사종수법(四種修法)을 채택하였으며 아사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의 밀교비법과 관법(觀法)을 경전에 의거하여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원정대성사의 각고의 정진과 부처님의 가지력(加持力)에 힘입어 정순하고 완전무결한 정통밀교의 조직과 체계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821, 드디어 관음(觀音)의 묘지력(妙智力)에 힘입어 정순(正純)하고 원숙(圓熟)한 정통밀교의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비장(秘藏)한 채 동대문구 상봉동으로 거주를 옮기면서 은거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동안 성사의 행방을 찾아 동분서주하던 진각종의 지혜 있는 스승들과 수많은 교도들은 원정대성사의 출현에 입교개종(立敎開宗)을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중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마침내 19721224, 서울 상봉동에 서울선교부(宣敎部)를 개설하여 개종불사(開宗佛事) 겸 창종식을 거행하였으며, 종명을 불교총지종(佛敎總指宗)’으로 정하여 정통밀교종의 성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정통밀교가 주옥같은 진언과 정확한 인계, 엄격한 의궤와 사종수법을 비롯하여 이론적인 교리가 정연한 교상과 사상을 갖추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후 한국현대밀교사상 최초로 삼매야계단(三昧耶戒壇)과 금강계단(金剛界壇)을 열어 관정식(灌頂式)을 베풀고 정통밀교를 전수할 아사리(阿闍梨)를 배출하였다. 또한 대승장엄보왕경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을 국내 최초로 번역하여 소의경전으로 삼고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 밀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천명했다.

 

생활의 불교화,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

이후 교세는 불꽃처럼 일어 창종 7년 만에 30여개 사원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진각종 시절의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여 교리를 새롭게 정비하고 행정기관인 통리원과 함께 교리적인 면을 뒷받침할 연구기관으로서 법장원을 신설하고 교도들의 참여와 신행활동을 돕기 위하여 신정회라는 모임도 만들도록 했다. 또한 처처불공, 시시불공(處處佛供, 時時佛供)’을 내세워 언제 어디서나 쉽게 불공을 올릴 수 있도록 모든 불사와 식순을 간소화하였다. 그야말로 생활의 불교화, 불교의 생활화를 실천할 수 있도록 어려운 밀교수법의 대중화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장계와 금강계의 양부 대법(大法)의 완성을 바라보며 명실상부한 정통밀교종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하던 중 대성사의 세연이 다하여 후인들에게 대업을 미루고 입적하였다.

198098일 밀법 홍포의 대원(大願)을 제자들에게 부촉(咐囑)하며 원정대성사는 74세를 일기로 이 세상의 인연을 다하고 입적하였으니, 실로 한국현대밀교의 중흥을 위하여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원정대성사의 밀엄국토건설과 정통밀교의 수립에 대한 대원은 총지종이 한국최초로 양부만다라를 완성하여 봉안한 것에서도 나타났듯이 끊임없이 계승, 발전되고 있다. 원정대성사의 입적과 원로 스승들의 잇따른 유고로 요원의 불꽃처럼 일어나던 교세가 잠시 주춤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 총지종은 새로운 도약의 자세로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이 땅에 처음으로 현대 밀교의 물꼬를 열고 대승불교의 새날을 개척한 원정대성사의 가지신력(加持神力)이 온 누리에 호국불교의 대비원(大悲院)과 함께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