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선물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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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3-31 13:38 조회3,04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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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면 두 작은아버지의 가족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 사나흘씩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집이 근처이기도 했거니와 이름 붙은 날이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 여덟 명에 아이들이 열넷. 도합 스물두 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세 끼를 챙기느라 부엌을 벗어나지 못하고 종종걸음을 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절대빈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해가 긴 여름엔 수제비나 국수로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때우는 날이 종종 있을 정도였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1년에 몇 번씩, 그것도 며칠씩 대가족을 치러야 하는 어머니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지금이야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그때는 그 북적거림이 즐겁기만 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설날이면 선물을 기다리는 막연한 설렘도 있었다. 시쳇말로 늘 입만 들고 다니던 작은아버지들이 가뭄에 콩 나듯 세뱃돈을 주기도 했고, 작은어머니들도 무언가 한 가지씩 들고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년에 한 번이 고작이었지만 작은집에서 내놓는 그것들에 대한 치하는 종류를 불문하고, 값으로 칠 수 없는 귀한 것이 되어 오랜 시간 두고두고 할머니의 입을 오르내렸다. 작은애들이 세뱃돈으로 얼마를 썼다네, 수탉보다도 큰 꿩을 잡아 왔다네, 귀한 달걀 한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네, 고등어 한 손을 사 왔다네…. 할머니는 마치 수십만 원을 받은 것처럼, 온 산의 꿩을 다 잡아온 것처럼, 양계장을 통째로 들고 온 것처럼, 고등어를 한 트럭 실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자랑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입을 삐쭉 내밀곤 했다.
알록달록 꽃무늬가 예쁜 옷, 털이 복슬복슬한 부츠,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각양각색의 학용품, 없는 게 없는 과자 종합선물 세트, 반짝거리는 구슬 목걸이… 내가 바라는 선물은 그런 것들이었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언니가 사 온 거라며 친구가 보여 주는 것들은 매번 새롭고 신기했다. 나도 그런 선물을 받고 싶었다. 명절 때마다 선물을 한 보따리씩 들고 찾아오는 일가친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린내 나는 고등어나 만두소에 다져 넣을 꿩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았으므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명절 풍속도 많이 바뀌었고, 시대상을 반영하듯 선물의 종류도 진화했다. 전쟁 직후라 모든 것이 부족했던 1950년대에 최고의 선물로 꼽히던 밀가루나 쌀, 달걀 같은 농수산물은 1960년대에 이르러 설탕, 통조림, 라면, 조미료 등 생필품과 가공식품에 자리를 내주었다. 산업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속옷 세트, 화장품, 치약, 술, 커피가 대세를 이루었고 경제가 급성장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굴비, 전복, 한우, 과일, 통조림 참치, 지갑, 벨트 등 선물이 더욱 고급스럽고 다양해졌다. 1990년대에는 받는 사람이 선물을 직접 고를 수 있는 상품권이 등장했고 2000년대 이후로는 건강에 대한 관심을 증명하듯 홍삼, 수삼, 꿀, 버섯, 영양제, 혈압계, 당뇨 체크기 등 건강식품이나 의료기기가 나왔고 최근에는 공연 관람권, 모바일 상품권, 호텔 숙박권, 스파 이용권 등 생활에 여유를 더하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선물이 인기몰이 중이다.
선물에 대한 선호도도 많이 달라졌다.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던 시절은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삶의 질을 생각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아르바이트 플랫폼 알바몬이 최근 성인 남녀 937명을 대상으로 가장 받고 싶은 설 명절 선물 종류를 조사했더니 상품권, 기프트 카드와 같은 유가증권이 1위, 고기나 과일, 생선 등 식재료가 2위로 꼽혔다고 한다.
반면에 그리 달갑지 않은 명절 선물 1위는 샴푸나 세제 등 생활용품, 2위는 참치, 스팸, 식용유 등 가공식품, 3위는 건강기능식품과 주류 등이었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큰 부담 없이 주고받던 품목이 외면을 받게 된 이유가 평소 사용하지 않는 제품이나 음식이라서,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주는 게 기쁘고 받는 게 고맙던 선물 본연의 의미가 퇴색한 것 같아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2016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나 1인 가구 증가, 코로나19 장기화도 선물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공무원, 교직원, 언론인 등 공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청탁금지법은 식사 접대비 1인당 3만 원, 선물 5만 원(농수산물은 10만 원/설ㆍ추석에 한해 20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으로 제한하고 이를 넘으면 과태료 처분을 받도록 한다. 또 1회에 100만 원 이상(연간 300만 원 한도)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대가성이 없어도 형사 처분하도록 했다. 5만 원 이상의 선물은 불법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실속 있으면서도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선물에 대한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1인 가구를 위해 손질된 식재료와 딱 맞는 양의 양념, 조리법을 세트로 구성해 제공하는 소포장 소용량의 밀키트 제품을 비롯해 1인용 미니 가전 및 가구 등 다양한 제품들도 인기 선물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대면 일상이 길어지면서 모바일이나 택배 서비스를 이용해 선물을 보내는 것도 코로나19가 불러온 변화다.
나도 올해는 온라인 계좌 이체로 설 선물을 주고받았다.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따뜻한 옷 사 입으라며, 필요한 데 쓰라며 동생네와 아들네가 보내 준 돈을 절반으로 뚝 잘라서 되돌려 주는 것으로 체면치레를 한 것이다. 멀리 사는 조카들이 찍어 보낸 동영상 세배를 받고 세뱃돈 역시 은행 계좌로 ‘쏴’ 줬다. 통계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요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 현금, 입금, 지금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취향에 맞지 않거나 소용이 없는 선물보다야 받는 사람이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현금도 안성맞춤형 선물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선물은 물건이나 돈이 아닌 마음이다. 받을 사람에게 맞는 선물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고 가격대도 생각해야 하지만,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과 함께 존경과 사랑이 담겨야 진짜 선물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이끌어가고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법구경』의 한 구절이,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한 선물의 마법을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