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불일암(佛日庵)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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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7-06 22:51 조회4,37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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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암(佛日庵) 가는 길
큰 절에 딸린 작은 절, 또는 도를 닦기 위하여 만든 자그마한 집, 암자庵子. 그런 의미에서 송광사 불일암은 그 고즈넉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마을과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 나무와 풀을 엮어 만든 임시 움막’이라는 숙연한 뜻을 되새기게 하는 곳이다.
송광사가 배출한 열여섯 명의 국사國師 중 제7대 자정慈靜 국사가 창건한 불일암의 본래 이름은 자정암慈靜庵이다. 오랜 세월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며 그 명맥을 이어 왔으나 6.25 전쟁으로 퇴락했던 이곳은 1975년, 법정 스님이 지금의 작은 암자를 짓고 불일암이라는 편액을 내걸면서 무소유의 대명사처럼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일佛日은 부처님을 해에 비유한 말이다. 부처님의 역할이 어둠을 밝히는 해와 같다는 이 말에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의 어둠을 부처님의 빛으로 없애고, 그 밝음 속에서 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한다.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부처님의 법이 미혹에 빠진 중생의 눈을 열어 주고, 마침내 진리에 이르게 해 준다는 뜻이리라.
불일암으로 가는 무소유 길은 송광사로 향하다가 만나게 되는 정자의 왼쪽,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편백나무와 삼나무, 단풍나무 사이로 난 조붓한 숲길은 부드러운 흙길이 되었다가, 뻗어 나온 나무뿌리가 만들어낸 계단 길이 되기도 하고, 군데군데 표지판에 담긴 스님의 좋은 글귀를 가슴에 새겨보는 사색의 길이 되기도 한다. 새소리 바람 소리가 함께하는 길이다. 서두를 일이 없다. 느릿느릿 천천히 걷노라면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삶을 통해 ‘무소유’의 참된 가치를 몸소 실천했던 스님의 발자취가 느껴질 것도 같다.
어느새 길은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로 접어든다. 그 끝에 활짝 열려 있는 작은 대나무 사립문이 있고, 거기서 두어 걸음 더 나아가면 모습을 드러내는 손바닥만 한 채마밭과 그 옆에 숨듯이 자리 잡고 있는 요사채 하사당…, 아! 그리고, 고즈넉함이 경건함을 더해 주는 작고 정갈한 암자, 불일암이!
천지사방 인적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한 불일암 뜰에 선다. 댓돌 위에 나란히 놓인 하얀 고무신과 까만 털신, 스님이 땔감용 참나무를 다듬어 만들었다는 투박한 의자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가슴에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불일암 뜰 앞 커다란 후박나무(향목련)를 우러러본다. 스님이 직접 심고 가꾸고 사랑했던 나무라고 한다. 스님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나무의 변화를 통해 각별한 사랑을 표현했던 바로 그 후박나무다. 봄이면 연꽃처럼 은은한 향기를 머금는 꽃이, 여름이면 나뭇잎에 듣는 빗방울 소리가, 가을이면 정적을 깨며 떨어지는 마른 잎이, 겨울이면 빈 가지만 남은 모습이 무소유를 연상케 한다던 후박나무는 이제 스님을 온몸으로 품어 안은 ‘법정 스님 계시는 곳’이 되어 묵묵히 서 있다.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라던 스님의 당부에 따른 조촐한 안식처에 그만 가슴이 뭉클해진다.
불일암을 떠나 1992년 강원도 평창 깊은 산중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17년간 이곳에서 수행했고, 2010년 입적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후박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모셔진 스님의 삶은 무소유로 대변된다.
모든 것들이 조금은 모자란 듯, 그러나 쓰임에 맞게, 소박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 불일암으로 오르는 길에 본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글귀를 무언으로 증명하는 것도 같다.
스님은 <무소유>라는 글에서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무소유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어쩌면 소유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 무소유인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많으면 지켜야 할 것도 많을 터. 하지만 더 갖고 싶고 더 누리고 싶은 것이 사람이다. 스스로 얽히고설킨 관계를 만들면서도 자유롭기를 바라다니, 그조차도 욕심이다.
숲을 흔드는 바람을 맞으면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다만 물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스님은 눈앞에 보이는 정형화된 틀, 심지어는 불교의 정형화된 틀조차도 거부했으며, 모든 것은 철저하게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 앞에 투철했던 분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 군사독재의 격동기에 서울 봉은사에 머물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을 시작으로 함석헌 선생,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강원용 목사 등 타 종교인들과 종교 간 대화를 이끌고 사회 활동과 민주화에 앞장섰던 분이기도 하다.
사회 민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군사독재 정권과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글로 세상과 소통했던 스님이, 동국역경원과 <대한 불교>에서 활동하며 왕성한 경전 번역과 집필 활동을 했던 스님이, 낡은 자정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열네 평짜리 불일암을 지었던 스님이, 송광사 수련원장과 보조 사상 연구원장으로 일했던 스님이 버림(!)으로써 얻고자 했던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거기에 대해 스님은 ‘재 출가’의 마음을 꼽았다. 무엇 때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고 자신의 그릇과 삶의 몫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면서 한동안 소홀했던 ‘중노릇’을 다시 익히고자 했다는 소회가 그것이다.
불일암이 번잡해지자 새가 낡은 둥지를 떠나듯 아무런 인연도 연고도 없는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 오두막에 ‘머무름이 없는 거처’를 마련하고 참선과 집필에 몰두한 것도 중노릇에 전념하고자 했던 스님의 뜻이자 무소유의 실천은 아니었을까.
작은 표지판에 담긴 짧은 글귀의 배웅을 받으면서 대나무 숲을 지나고 삼나무, 편백나무 어우러진 숲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길,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많은 것들이 바람처럼 소리 내며 마음을 흔든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아름다운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