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너무도 다정한 당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3-30 11:37 조회4,359회관련링크
본문
너무도 다정한 당신
전화이긴 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배가 터질 정도로 핀잔을 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터져 나오는 격앙된 목소리가 나의 무심함을, 나의 인정머리 없음을, 나의 무미건조함을 마구 질타했다. 무어라고 대꾸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쏟아 부어지는 속사포를 고스란히 맞노라니 전화가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무기武器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그 무거운 기분이라니. 전화를 받은 것이 또다시 후회스러워졌다.
전화 속 그녀는 더없이 착하다. 오지랖이 태평양보다 넓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정도 많고 마음 씀씀이도 넉넉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그런 그녀의 전화가 반갑지 않을 때가 많다. 날씨가 어떠냐, 무슨 반찬을 해 먹었느냐, 재미있는 일은 없느냐, 오늘은 뭐 할 참이냐 등등에서 시작해 앞집 뒷집 옆집 강아지 고양이 안부까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 자신의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밑두리콧두리 캐는 전화가 때로는 무섭기도 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짧아야 한 시간 길게는 두어 시간 이상 이어지는 통화가 고역스럽다 못해 고문처럼 느껴질 때가 태반이니. 그녀가 전화를 한다는 건 십중팔구 심심하다는 얘기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니 아무런 맥락도 없다. 소소한 일상에서 시작되어 종잡을 수 없이 갈팡질팡 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전화를 중계방송하자면 대강 이런 식이다.
…공원에 산책 나왔는데 어머나, 저 아줌마는 개 목줄도 안 하고 입마개도 안 했네. 사람들 참 이상해. 기본이 안 돼 있어. 자기들한테만 애견이지 나처럼 개 싫어하는 사람들한테는 맹견일 수도 있잖아. 저런 건 과태료를 물려야 하는데. 신고하는 사람들에게 주던 포상금도 개파라치 극성 때문에 없앴다더라. 정말 개판이야. 정책이라는 게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오늘 우리 동네 장날이잖아. 생물 고등어 세 마리에 5천 원이라네. 싸지? 무는 한 개에 2천 원인데 10분 세일이라고 3천 원에 두 개 가져가래. 5천 원에 네 개 달라니까 안 판단다. 치사스러워서 두 개만 사야지. 무 어슷어슷 썰어서 깔고 간장 양념에 얼큰하게 조리면 맛있어. 고등어 조릴 때 된장 조금 넣어. 그래야 비린내가 안 나거든.
…샴푸 없이 머리 감는 노 샴푸 있지. 베이킹파우더나 베이킹 소다, 식초 같은 걸 쓰는 사람도 있다는데 난 그냥 물로만 감아. 두피가 건강해져서 머릿결도 부드러워지고 탈모 방지도 된대. 아프리카에 대머리가 없는 것도 다 샴푸를 쓰지 않아서래. 영국의 해리 왕자, 할리우드 스타 조니 뎁, 기네스 펠트로, 로버트 패틴슨도 노 샴푸 추종자라더라. 너도 해 봐. 정말 좋아. 나도 한 달쯤 됐는데 머리카락에 힘도 생기고 숱도 많아진 것 같다니까.
…나 요즘 각종 비타민에 콜라겐, 유산균, 석류까지 다 들어있는 거 먹기 시작했어. 오메가3 하고 루테인은 따로 먹지. 골다공증에 관절염에 혈액 순환, 치매ㆍ뇌졸중 예방, 노화 방지 기타 등등 챙길 게 좀 많니? 면역력 강화를 위해서는 홍삼도 좋지만 단백질 보충도 필수라더라. 너도 좀 챙겨 먹어. 너는 너무 안 챙겨 먹는 게 탈이야.
…언니가 시동생의 장모님이 직접 담근 청국장을 보내 줬는데, 그 사돈 마나님 음식 솜씨가 예술이래. 얼마 전에 딸 결혼시키면서 이바지 음식을 직접 했다지 뭐니? 갈비에 전복, 문어, 굴비, 구절판, 모둠전, 홍삼정과, 한과, 떡, 과일까지 얼마나 야무지게 장만을 했는지 사돈네 일가친척들이 다 기절초풍을 했다는 거야. 음식도 전통자수 명인이 만든 보자기로 싸서 보냈대. 결혼 반대했던 사돈네한테 보란 듯이, 사돈네 기죽인다고.
…아들이고 며느리고 가르쳐야 하겠더라. 잘못하는 거 있으면 딱딱 짚어서 고쳐주고. 좋은 게 좋다고 내버려 두면 머리 꼭대기에서 춤을 춘다니까. 요즘 애들이 좀 똑똑하고 영악하니? 그리고, 애들이 뭐해준다고 하면 눈 딱 감고 받아. 어디 가서 밥 먹고 차 마실 때도 애들한테 계산하라 그러고. 너처럼 자꾸 사양하지? 버릇돼. 나중엔 용돈 한 푼 없어.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했다. 나와는 관련도 없는 일인데다가 매번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본 적조차 없는 누군가의 별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흥미도 재미도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듣는다? 휴대전화가 뜨끈뜨끈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몇 번만 겪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게다가 가끔 한 번씩 이런 강펀치를 맞기라도 한다면…?
…전화하다가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니? 어떻게 너는 내가 전화하지 않으면 생전 전화하는 법이 없니? 용건이 없으면 전화도 못 하니?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안부전화라도 하면 어디가 덧난대? 손가락이라도 부러져? 그러고도 친구야? 친구 맞아? 용건만 간단히 하자고? 공동 관심사만 얘기하자고? 너 진짜 못됐다. 세상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그러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전화가 길어질 수도 있는 거지. 그럼 우리가 정치 경제를 논하랴? 만나서 수다 떤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너처럼 까다롭고 삭막해서 어떻게 산다니?
그녀의 집중포화는 전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한동안 심심하지 않았던’ 그녀가 보내는 ‘이제는 심심해졌다’라는 신호인 셈이다. 하지만 심심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나로서는 내 사정과 무관한,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인 그녀의 질타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녀는 나의 무심함이 서운하고, 나는 그녀의 다정함이 무겁다. 서로의 ‘다름’을 ‘틀림’이라고 생각하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우리의 모양새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 자신인 양,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사람 역시 없을 터. 사람마다 성격이나 생활방식, 표현 방법이 다르듯 그녀도 나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면 얼마나 좋겠냐만… 황소 심줄만큼이나 단단해진 고집으로 한사코 자기 영역을 고집하는 건 그녀나 나나 다름이 없으니 마음이 쓰라릴 수밖에.
어쩌면 부처님께서 “범부들은 각기 별개의 진리에 집착해서 자기 것은 옳고 다른 사람 것은 그르다 비난한다.”라는 <사제론>의 말씀을 들어 빙긋 웃으실 지도 모르겠다. 그래, 너는 아직 어리석은 중생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시면서 말이다. 지금쯤, 내게 날린 강펀치 때문에 지금의 나처럼 속이 시끄러울 그녀. 다정이 병인 그녀에게 언제쯤이나 너는 참 듬직해, 간질간질한 칭찬 한번 받아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