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 혜학이란 무엇인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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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5-13 15:08 조회4,18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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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지는 중도의 실천에서
매사를 나와 대상을 나누어 보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분별지와 무분별지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조차도 마찬가지 분별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에는 번뇌가 늘 있다.’, 혹은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라고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도 분별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러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수행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것도 모르고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분별이 생겨 알게 모르게 자신과 남을 차별하게 됩니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상당히 오만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 사람의 이러한 차별심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나는 다른 사람보다 진리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들을 실천하기 때문에 뛰어난 자이다 라고 하는 분별심이 자기도 모르게 생기고,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오만하고 도도하며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착이라는 것은 허망분별이며 헤아림으로부터 생기는 마음입니다. 여러 가지 선행은 당연히 좋은 것이며, 그것을 권장하여도 불교에서는 거기에 이러한 분별과 집착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선행이다. 아니다. 혹은 바른 것이다. 그른 것이다 라고 구분하는 것도 언어에 의한 분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에는 분별이라는 것이 작용하며 따라서 온갖 집착이 따라다닙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는 실제적 대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합니다. 이런 것이 나에게 있었으면 하고 집착을 하기도 하고, 혹은 진리라든가 평화, 정의 등과 같은 개념적인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진리라고 하여도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진리인 것과 진리 아닌 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또 하나의 집착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집착이 생기면 번뇌가 따라오고 거기에 따라 괴로움이 생깁니다. 진리나 선, 혹은 정의 평화 등과 같은 것은 좋은 개념이지만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돈이나 명예, 혹은 다른 것에 집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괴로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악이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집착의 대상이 어느 정도이며, 그러한 집착에 의하여 얼마나 큰 폐단이 생기고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따라 악이고 나쁜 것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거기에 집착하여 매진한 것이 때로는 너무 지나쳐 사회 전체를 이상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것이 이제는 도리어 발전을 저해하는 폐단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중국의 홍위병들이 자기들은 사회정의를 실천한다고 그렇게 날뛰었지만 결과는 얼마나 비참하게 되어 버렸습니까? 수많은 사람을 해치고 귀중한 문화재를 훼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의에 집착하는 것이 돈이나 명예에 집착하여 몸을 망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또 종교나 신앙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기 위하여 종교를 가지고 신앙을 가지는 것이 너무 지나쳐 집착이 되어 버리면 이것이 도리어 이웃을 괴롭히는 악행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종교전쟁으로 발전해서 큰 비극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세계평화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전쟁을 불러 일으켜 온 세계를 잿덩이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경계하여 분별을 가지지 말라고 하는 것이며 집착을 놓아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분별을 끊는 무분별지를 얻어 궁극적으로는 번뇌를 단멸하여 참된 행복과 안락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지혜를 완성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신앙은 무조건 믿으며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믿으면 믿을수록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립니다. 타 종교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혜를 개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믿다보니 그런 결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에 항상 이러한 맹목적 신앙의 폐단을 경계하고 바른 지혜를 얻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분별하지 않는다, 혹은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상대를 의식하지 않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를 보지 않는다든가 무시한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상대를 무시한다, 보지 않는다라는 것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집착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시하지만, 또한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집착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에도 집착하다가 보면 거기에서도 번뇌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는 그것이 진리이든 선이든 예외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참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집착하지 않는 것, 즉 해탈 혹은 열반을 목표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탈이나 열반의 경지가 곧 무분별지의 세계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선행이나 수행에 있어서도 목표로 하는 것은 무분별의 지혜에 의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중도라는 말로써 나타낼 수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는다, 분별하여 치우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중도인데, 이것은 연기와 공이라는 불교의 근본교리를 실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분별지는 연기와 공의 이치를 체득한 지혜를 말하며, 연기와 공이라는 불교의 진리와 일체화한 지혜를 말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깨달음의 지혜로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