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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 [속담으로 보는 불교] 모래로 밥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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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2-02 14:40 조회2,3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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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로 밥 짓기” 밥 짓는 시늉은 하지만, 수고만 들어갈 뿐 결과는 없다. 우리가 흔히 입에 담는 속담이지만, 그 출처는 불전에 있다. 『능엄경』에서는 “만일 음욕을 끊지 않고서 선정을 닦는다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쓰고 있다. 이후 한산寒山의 시문이나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에서도 이 비유를 차용한다.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열반이다. 수혹修惑이라고 부르는 감성적 번뇌와 견혹見惑이라고 명명하는 인지認知적 번뇌가 모두 사라지면 열반에 도달한다. 즉, 깨달음을 얻는다. 몸이나 마음에 내가 있다는 생각(유신견),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이 이어져 있다거나 끊어져 있다는 생각(변집견),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생각(사견), 이들 유신견, 변집견, 사견을 올바른 사상이라고 보는 생각(견취견), 잘못된 수행을 생천의 원인으로 생각하든지, 지계만으로도 해탈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계금취견), 사성제에 대한 의심(의) 등이, 견혹이라고 부르는 ‘인지적 번뇌’에 해당하고 탐욕, 분노, 교만 등이 수혹이라고 부르는 ‘감성적 번뇌’에 해당한다. 이런 번뇌가 모두 사라져야 불교수행의 궁극 목표인 열반에 도달한다.


 불전에서는 지혜를 크게 무루지無漏智와 유루지有漏智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무루지는 이들 번뇌의 뿌리를 뽑아서 완전히 제거하는 지혜를 의미하고, 유루지는 이들 번뇌를 눌러서 나타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무루지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지혜이며, 유루지는 외도들도 알고 있던 지혜다. 유루지로 번뇌를 누르는 경우, 언제나 다시 번뇌가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루지를 계발하는 게 중요하며, 무루지는 고, 집, 멸, 도의 사성제를 직관함으로써 체득되는데, 이렇게 사성제를 직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멸성제에 대한 직관이다.


 즉 감성에서든 인지認知에서든, 번뇌(집)와 고통(고)의 완전한 소멸을 직관해야 무루지가 열린다. 인지의 차원에서 이렇게 무루지가 열린 성자를 수다원이라고 부른다. 수다원은 산스끄리뜨어 ‘스로따 아빤나(srota āpanna)’의 음사어인데,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라고 한역하며, ‘흐름에 들어간 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흐름’이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으로 향상하는 ‘성자의 흐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 특유의 무루지는 어디에서나 열리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사는 현장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로 구분되는데, 수행자의 마음이 색계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무루지가 열린다. 정확히 말하면 색계 초선정의 바로 직전인 미지정未至定 이상 되어야 사성제를 직관하여 무루지가 생길 수 있다.


 즉 수행자의 마음이 최소한 욕계의 차원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야 무루지가 열린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식욕이나 성욕, 분노와 같은 동물적 감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수행자에게만 무루지가 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동물적 감성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수행이 바로 지계행이다.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이간질, 험한 욕설, 꾸밈말, 탐욕, 분노, 사견 등 십악의 동물적인 행동에서 벗어나야 그 마음이 색계의 차원으로 향상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을 끊지 못한 사람이 참선이나 명상, 삼매를 닦을 경우, 그 겉모습만 좌선하는 모습일 뿐이지, 결코 열반을 체득할 수 없다. 모래로 밥 짓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