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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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 늙으면 좋은 것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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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2-28 13:21 조회2,4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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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면 공부 안 해도 된다. 늙으면 새로 시집 안 가도 된다.

늙으면 애 안 낳고 애 안 키워도 된다. 늙으면 직장 생활 안 해도 된다.

65세 넘으면 국민연금 나오고 혜택이 많이 주어진다.

죽으면 죽은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죽는 게 두렵다 하는 것은 살아 있을 때 얘기다.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다는 것을 즐기면 된다.

아파도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라.

그렇다고 죽는 것이 나쁜가 하면 그렇지 않다 .

죽으면 그런 거 모르기 때문에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물음에 유쾌하고 명확한 답을 주는 법륜 스님의 ‘늙으면 좋은 것 천지다’라는 즉문즉설에 웃음이 난다. 늙으면 좋은 것 천지라는 말이 따뜻한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을 계절로 나눠 본다면 초가을 고개를 슬쩍 넘어섰다고나 할까, 인생을 하루로 나눠 본다면 해가 지기 전 막 노을이 깔릴 무렵이라고 해야 할까. 딱 그 즈음의 나이가 되고 보니 남은 계절,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지곤 한다.


 이름하여 노후. 사람은 누구나 다 나이를 먹고 나이만큼 늙어간다. 하지만 모두가 다 잘 늙지는 못한다. 수년 전 모 글로벌 금융사가 전 세계 30~60세 사이의 1만 7,000명을 대상으로 ‘은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것’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자유, 만족, 행복이라는 선진국의 답변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적 어려움, 두려움, 외로움, 지루함 순의 그야말로 우울한 답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부실한 연금제도나 노인복지제도의 반영일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주어졌으나 그것을 소화할 여력이 없다. 현재는 막막하고 미래는 불안하다. 평생을 열심히 일했지만 정작 오래도록 늙어가야 할 자신을 위한 준비에는 서툴렀던 탓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사람 만날 기회가 적어져서 그런지 이상형을 찾기 위해 익명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20~30대 직장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씁쓸한 건 기본 항목의 변화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본인의 나이, 학벌, 직업, 외모, 성격, 취미 정도에 그쳤던 고전적인 문항에 경제력이 더해지더니 최근에는 부모의 노후 생활에 대한 설명이 필수 항목처럼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부모의 노후가 얼마나 탄탄하게 준비되어 있는가. 그것은 30~40년이라는 긴 시간, 부모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차대한 전환점이기도 하다.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부모의 시간보다 더 길고 아득하다. 당연시되어 왔던 부모 부양이라는 미덕이 만남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떠올랐다는게 서글프긴 하지만 청춘들의 고뇌를 탓할 수는 없다. 그만큼 사는 게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효도 계약서라는 신문물(!)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이 계약서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갑’인 부모가 ‘을’인 자식을 상대로 부양을 약속받는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계약서에는 을은 갑에게 매달 생활비 얼마를 준다거나 날짜를 정해놓고 갑과 함께 식사나 여행을 한다는 등 세세한 조건은 물론, 이를 어길 시 증여를 취소한다는 조항까지 담겨 있다고 한다. 부모는 재산을 담보로 효도를 요구하고, 자식은 대가를 얻기 위해 효도를 약속한다. 하지만 문서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난해만 해도 효도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며 자식을 상대로 부모가 제기한 부양료 청구, 재산 반환 소송 등 법정 다툼이 250여 건을 넘겼다고 하니 결과야 어찌 됐든 이미 깨져버린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시절은 변하는데 사람이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탓일까. 얼마전 세상을 떠난 K 선생의 유해를 평장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그의 친구 J 선생이 분노에 찬 어조로 불효막심한 자식들을 맹비난했다. 맨 땅바닥에 봉분도 없이 손바닥만 한 비석 하나 달랑 얹어놓았으니 아버지의 유해를 산중에 함부로 내다 버린거나 진배없다는 얘기였다. 자식이 셋이나 되면 뭐 하느냐, 의사입네 교수입네 다 소용없다, 망자의 뜻이었다고는 하지만 평소입던 허름한 잠옷 입혀 저승길 가게 한 것도 기가 찰 일인데 장남은 피치 못할 회의가 있다고 입관 절차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로 내빼고, 교회 다닌다는 작은아들 내외는 아버지한테 절하는 것도 마다하고, 막내딸은 그런 오빠들을 짓씹으며 유산 같은건 꿈도 꾸지 말라고 난리를 치더라나. 아무리 살기 바쁘고 제앞가림이 급해도 사람의 도리는 지켜야 하는 법이라며, 그래서 그는 지난 설에도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나란히 앉혀놓고 효도하지 않는 자식에게는 백 원짜리 동전도 하나 없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면서 그야말로 갑의 위용을 자랑했다.


 엎드려 절 받기다. 목소리가 크다고 갑이 아니고 고개 숙이고 있다고 을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막무가내로, 그렇게 일방적으로 효를 강요하는 건 어쩐지 구차스럽고 공허하다. 어디에 묻히든 그것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한 줌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슨 옷을 입으면 어떻고 자식들의 애끊는 통곡이 없으면 또 어떤가. 세월이 더해주는 대로 나이를 먹고, 나이만큼 늙었다고 해서 다 어른은 아닐 터. 노인에게 남은 가장 큰 숙제는 자신을 버리는 일인 것 같다. 과거라는 낡은 잣대로 현재와 미래를 재단하기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게 먼저다.


 늙는다는 것은 경제적인 능력과 함께 건강도 점점 더 나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해지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야 할 날이 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늙으면 좋은 것 천지’라는 말 그대로 노년의 하루하루가 온화한 빛으로 점점 더 빛났으면 좋겠다. 툭하면 동네북이라도 되는 양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그라지고 마는 노인 빈곤과 질병, 사회적인 고립감, 외로움, 학대, 방임… 또 그로 인한 자살과 같은 말조차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공짜는 없다. 100세 시대, 보너스로 받게 된 20년쯤의 삶을 축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본생담』의 한 구절처럼 ‘인생은 초대하지 않아도 찾아오고 허락하지 않아도 떠나간다.’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내려놓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매일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듯 노년의 삶도 여전히 새롭고, 새로워져야 한다.


 다만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을 뿐, 풀밭에 작은 비석 하나로 남아도 그만이고, 그조차 없이 나무 아래 묻혀도 아쉬울 게 없다. 그저 나답게 살아볼 일이다. 이왕이면 멋지게, 건강하게, 씩씩하게. 태양에 가려졌던 수많은 별이 하나둘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하는 딱 이맘때, 우리 모두의 별이 서서히 제 빛을 발할 수 있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