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 다시 걸은 남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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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9-30 13:52 조회2,40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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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남산길을 다시 걸었다. 무더위에 이어 강한 태풍이 지나갔던 여름철을 보내고 추석을 코앞에 둔 청량한 가을, 한 발씩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숲속 그늘에 드리워진 가을 정취 속에 멋진 도반들과 함께한 덕분에 기쁨은 더했다. 사부대중이 함께한 야단법석野壇法席에 코로나도 잠시 자리를 비껴준 느낌이었다.
필자가 남산길을 좋아하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유네스코 행사를 취재 겸 참여한 인연이다. 유네스코는 어린이날이면 남산길을 맨발로 걷는 행사를 했는데, 봄날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흩날리는 숲길을 걷다보니 마치 선경仙境에 있는 듯한 감흥을 받았다. 동참한 가족들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언젠가 나도 이런 행사를 개최했으면 좋겠다는 발원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다.
정말로 세상에 우연은 없다. 세월이 흘러 다른 부서에 부서장으로 배치되어 걷기행사를 주관하게 되다니. 우선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시점에 걷기를 하면 연등행렬 참가자들에게는 준비운동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일반 도로가 아닌 숲속길이라서 공기도 더 좋고, 도란도란 걸으며 정을 나누고 마음도 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세 든 분들도 쉽게 걸을만한 적당한 거리를 계획했다. 또 걷기만으로는 너무 조촐하다싶어 스님 세 분의 북콘서트도 진행했다.
이제 와서는 편안하게 떠올리는 추억이지만 진행과정에서는 힘든 일도 없지 않았다. 행사 자체에 부정적이던 간부가 “행사 당일 비가 오면 어떡하죠?”라고 했다. ‘어떻게 하긴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대처해서 해야지요.’라며 속으로 상대를 비난했다.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이유를 백가지도 댄다면서.
아뿔싸. 일요일 행사를 앞두고 이틀 전인 금요일부터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취소 여론이 높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연기되었던 행사인데다 홍보도 다 해놓았는데 갑자기 취소되면 회사의 이미지 하락이 걱정되었다. 오시라고 개인적으로 초청한 지인들께도 송구스러운 일이다. 사내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다행히도 사장님은 직원 단합대회를 겸하고 가족까지 동참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주셨다. 얼마나 감사하고 든든한 일이던지.
초청 내빈인 서울시장 측에는 바쁘시면 꼭 오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연락을 드렸다. 참석자가 너무 적어 초라하게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시장님은 뜻 깊은 행사에는 무조건 갑니다”라는 것이었다. 아… 감사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일 오전까지 강한 빗줄기가 이어지며 서울시가 직접 주최한 걷기행사는 어렵사리 진행됐다. 그런데 오후 들어 날이 개면서 우리행사는 다소 무난하게 진행됐다.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시장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
“아! 스님들은 이렇게 법력이 높으십니다. 비도 그치게 하고요.” 이 때 동참했던 한 스님 왈,
“그럼요. 스님들이 그 정도 법력은 있지요.” 대중이 다들 웃었다.
염두에 두고 싶지 않았던 상황은 도래했고, 그에 따른 대처는 이뤄졌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상황은 언제나 가변적이며, 개인의 바람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미래를 바라봄에 있어서는 그 누구의 예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 어쩌라고? 이것도 한 판의 바둑이요 저것도 한 판의 바둑이라는 말처럼 일체가 인연소생因緣所生이니 어떤 상황도 수용하고 대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인연사에서 향상일로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우리는 행복한 불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