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우정 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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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9-30 11:52 조회2,60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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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지기인 사실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을 읽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은 에밀 졸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게 됐다며 격노했고, 그 후 다시는 에밀 졸라를 만나지 않았다. 소설책 한 권이 그들의 오랜 우정을 공중분해시키고 만 것이다.
소설 <작품>에서 실패한 천재 화가 클로드 랑티에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결국 그림 앞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누가 봐도 세잔이라고 짐작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즈음,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명성을 떨치던 에밀 졸라와 달리 미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심한 우울증과 자괴감에 빠져 있었던 세잔에게는 치명타였을 것이다.
에밀 졸라는 주인공 랑티에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예술가들이 겪는 창조의 어려움을 투영시키고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을 연상시키는 인물, 자신의 현실과 흡사한 줄거리는 세잔에게 심한 배신감과 함께 패배자로 죽으라는 조롱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세잔으로서는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이 몇 배 더 아플 수밖에. 오해든 지나친 피해의식이든, 친구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당하는 건 참기 힘든 모욕이었을 테니 말이다.
세잔과 에밀 졸라처럼 오랜 세월 깊은 정을 나눠 왔던 친구들이 앙숙이 되는 일을 가끔 보게 된다. 40년 지기인 A와 B도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꼽혔든, 19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추앙을 받았든,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든, 사람의 감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세잔은 에밀 졸라가 명성을 얻으면서 불친절해지고 은혜를 베풀듯이 자신을 대한다고 생각했고,에밀 졸라는 세잔의 천재성은 인정하면서도 사회적인 문제를 담지 않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실패한 화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화를 부르는 단초가 되었을 법하다.
누구보다도 가까워 보였던 A와 B가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된 까닭도 이와 비슷하다. 개인의 사생활이라 전후 사정을 시시콜콜 밝히기는 어렵지만 일어나야 할 일이 마침내 터졌다고나 할까. 세잔과 졸라의 결별이 이미 오래전부터 균열의 조짐을 보여 왔듯이 서서히 정상궤도를 벗어나고 있는 A와 B의 관계 역시 초읽기에 들어간 시한폭탄 같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소설가로 부와 명예를 얻은 에밀 졸라가 불운하고 가난한 세잔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해 준 것처럼 A 역시 그리 넉넉하지 않은 B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잔이 에밀 졸라의 호의에서 불친절과 오만을 느꼈던 것처럼, B는 눈앞에서 보여주는 따뜻한 면면과 다른 A의 또 다른 얼굴에서 번번이 심한 배신감과 함께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이곳저곳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오는 A의 험담은 B의 마음에 씻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남기곤 했다.
A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B와의 만남을 꺼렸다. 나 역시 B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도량 넓고 늘 베풀기만 하는 A에게 주야장천 빨대를 꽂고 사는 몰염치한 친구 B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모난 성격에 욕심 많고 고집 세고 이기적이며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데. 고마움에 대한 보답은커녕 친구인 A를 시샘하고 견제한다는 B, 그렇게 뻔뻔한 인간을 끝끝내 끌어안고 가는 A-그게 A가 말하는 B였고, 하해와 같은 A의 우정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사실도 진실도 아닌 얘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B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순수하고 인정 많았던 A를 떠올리며 아니려니, 그럴 리가 없어, 하면서 몇 번이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장두노미藏頭露尾라고 했던가. 머리는 숨겼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꼬리가 드러난 건 A 아들의 결혼식 피로연에서였다. 지방에서 올라가느라 새벽 첫차를 탔지만 예식이 끝난 후에야 도착한 B는 폐백을 받고 있는 A를 기다릴 겸 피로연장으로 갔더란다. 빈자리를 찾아서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으니….
“그 친구는 안 왔나 봐? 부조까지 떼먹은 건 아니겠지?”
“설마! 아무리 짠순이라도 부조는 했겠지. A한테 받은 게 얼만데!”
“고마운 걸 통 모른다잖아. 욕심은 하늘을 찌르고.”
“잘난 척은 엄청나게 한다며, 남 잘 되는 꼴 못 보고.”
“그 얘기 들었지? 그 친구 말이야, 사는 게….”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만리장성이었다. 쫓기듯 피로연장을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아뿔싸! A와 딱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A는 반가워 죽겠다는 얼굴로 B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난했던 B의 인생사를 속속들이 까발리고 덧칠해서 어두운 과거지사로 전락시킨 A가,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B의 희생조차 야박하고 인색하다는 말로 변질시킨 A가 우아한 미소로 B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그 여인들에게 하는 말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친구야. 동생들 공부시키고, 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 뒷바라지하고, 자기 앞가림 똑 부러지게 잘하고, 씩씩하고, 알뜰하고. 내가 말했지? 정말 본받을 게 많은 친구라고.
절교보다 절연에 가까운 두 사람의 관계가 ‘우정은 상호 간에 오가는 신뢰’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되새기게 한다.
친할수록 한 번 쌓인 오해는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고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조심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얼마나 오래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인가에 따라 격이 달라지는 데 말이다. 『테라가타』의 말씀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남보다 뛰어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진실조차 자신의 틀에 맞추기 마련이라 오랜 세월이 무색해지고 만다.
굳이 인연에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에게 흠집을 내고 상대를 깎아내려서 자신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상대를 밟고 올라서면서까지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관계라면 애써 그것을 이어 붙이려 하지 않는 것이 답일 수도 있겠다.
‘명예를 얻고자 하면 계율을 지키고, 재물을 얻고자 하면 보시를 행하고, 덕망을 얻으려 하면 진실한 삶을 살고, 좋은 벗을 얻고자 하면 먼저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라는 『잡아함경』의 가르침대로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면 물질과 명예와는 상관없이 덕망을 얻을 수 있다. 좋은 벗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