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차 한 잔에 담긴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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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10-31 13:36 조회2,69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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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가을은 커피 향과 함께 깊어간다. 강릉커피축제 한마당이 펼쳐져야 아, 가을이구나 하는 실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람객 50만여 명이라는 기록에 걸맞게 강릉커피축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80여 축제 중 브랜드 평판 2위에 오르면서 커피의 위상을 단순한 음료가 아닌 문화로 승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열네 번째인 올해도 강릉을 비롯한 전국 유명 커피업체들이 참가하는 커피 무료 시음행사, 커피 명인들의 노하우를 듣는 세미나를 비롯해 로스팅, 핸드드립, 라테아트 등 각 분야 최고를 뽑는 바리스타 경연 대회, 온·오프라인으로 각 100명의 바리스타가 참여하는 ‘200人 200味 바리스타 퍼포먼스’, 커피와 함께하는 콘서트, 커피 관련 체험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려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커피 향 그윽한 가을의 낭만과 추억을 선사했다.
강릉은 예로부터 차 문화가 발달했던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강동면 하시동에 신라시대 차 문화 유적지인 한송정寒松亭 다구茶具 유적이 남아 있다. 화랑들이 강릉의 명승을 찾아 차를 달여 마셨다는 기록은 곧, 강릉이 ‘커피 도시’가 될 만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그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한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자판기 커피로 유명한 1980년대 안목(강릉항)의 ‘길다방’이다. 길다방 전성시대의 숨은 공로자는 30여 대의 자판기에 저마다의 비법으로 독특한 맛을 담아냈던 선구적 바리스타(!)들이었다. 이는 멀기만 했던 커피를 우리네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분수령이자, 훗날 ‘커피도시 강릉’을 만드는 서막이기도 했다. 강릉커피거리가 활성화되고, 유명 바리스타들이 강릉에 둥지를 틀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커피는 원두의 종류와 생산지, 추출 방식, 첨가물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게 구분된다. 커피 특유의 향은 생두를 볶는 로스팅(roasting) 과정에서 생기는데, 같은 원두라도 로스팅이나 각기 다른 원두를 섞는 블렌딩(blending), 원두를 가는 그라인딩 (grinding)의 방법이나 정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커피 메뉴의 대부분은 에스프레소(또는 카페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원두커피, 카페라테를 기본으로 만들어진다. ‘에스프레소’는 기계를 이용해서 고온·고압으로 단번에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이 적고, 맛과 향이 진하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커피의 대명사와 같은 ‘아메리카노’가 되고, 우유 거품을 얹어 계피나 코코아 가루를 뿌리면 TV 드라마의 거품 키스로 유명세를 치른 ‘카푸치노’, 초콜릿을 더하면 ‘카페 모카’, 에스프레소와 뜨거운 우유를 1:4로 섞으면 ‘카페라테’가 된다.
에스프레소에 점찍듯이 데운 우유를 한 스푼 살짝 올리면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데운 우유에 에스프레소 한 잔을 얹으면 ‘라테 마키아토’, 라테 마키아토에 캐러멜 소스를 첨가한 것이 ‘캐러멜 마키아토’이다.
에스프레소에 휘핑크림을 얹으면 마키아토와 비슷하지만 단맛이 강한 ‘콘 파나’가, 긴 유리잔에 에스프레소를 담고 얼음과 설탕 시럽을 얹으면 아이스커피의 일종인 ‘카페 프레도’가, 초콜릿 시럽을 뿌리고 우유 거품을 얹으면 ‘카페 토리노’가 만들어진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더하면 멋스러운 ‘아포 가도’가 된다. ‘아메리카노’에 차가운 휘핑크림을 듬뿍 얹은 ‘비엔나커피’는 커피의 쌉싸래한 맛과, 휘핑크림이 녹으면서 진해지는 단맛이 포인트라 휘핑크림을 젓지 말고 음미해야 한다.
또 다른 추출 방식으로 핸드 드립 커피와 더치커피를 들 수 있다. ‘핸드 드립 커피’는 분쇄한 커피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커피를 내리는데, 커피 고유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 ‘더치커피’는 커피에 상온의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추출하는 과정이 눈물 같다고 하여 ‘커피의 눈물’이라고도 하고, 숙성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커피의 와인’이라고도 한다. 커피의 쓴맛을 없애고 좋은 맛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만든 방법이라고 한다.
자,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멋진 곳에서, 최고의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아주 비싼 커피? 아니다. 가장 맛있는 커피는 좋은 사람과 마시는 커피이다. 자신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커피라면 더 바랄 게 없다. 100% 완벽한 커피가 반드시 맛있는 커피는 아니다. 커피 만드는 기술이 절반이라면, 커피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절반,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느낌이 그 모든 것에 앞서기 때문이다.
강릉커피축제에 버금가는 차 축제도 있다. 이맘때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 선사의 다도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국내 최대의 차 축제 해남 초의문화제가 그것이다. 조선 후기 불교사를 빛낸 초의 선사는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 당대의 다인들과 교류하며 다도를 정립하고 차를 중심으로 한 심오한 사상을 나누기도 했다. 한국의 다경茶經이라 불리는 자신의 저서 『동다송』에서 그는 우리 차의 색과 향, 기운과 맛이 중국차에 뒤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차를 채취해 만드는 법, 끓이고 마시는 법, 성질과 효능 등 다도정신을 널리 알리며 차 문화의 중흥을 이끌었다.
초의 선사가 반평생을 지낸 일지암이 지금까지도 다인(茶人)들이 찾는 다도의 탄생지로 자리매김한 것도, 해마다 초의문화제가 열리는 것도 차가 부처님께 올리는 육법공양(六法供養) 중 하나라는 영향이 크다. 육법공양은 부처님 전에 향, 등, 꽃, 과일, 차, 쌀,이 여섯 가지의 공양물을 올림으로써 부처님의 공덕에 감사하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살행을 다짐하는 불교의식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차는 ‘감로다甘露茶’라 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의 상징이자 불로장생하는 신묘한 천상의 음료를 뜻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주된 공양물의 하나이자 수행자들이 심신을 닦는 소중한 방편이기도 하다. 감로다 맑은 물로 마음의 오욕을 씻고 법문을 받들어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서원을 담아 부처님께 올리는 것이 다 공양茶供養이다.
커피도 좋고 차도 좋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자신과 소통하는 시간이자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시간이다. 차를 마시려는 사람은 정성스러운 행실과 검소한 덕망(정행검덕 精行儉德)을 갖추어야 한다는 당나라 사람 육우의 말처럼 따뜻한 차 한 잔 앞에 놓고 깊어가는 가을을 한껏 음미해 보는 것도 운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