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노선 변경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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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7-31 14:35 조회2,197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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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라 이웃 할머니 댁에 또 아들네가 왔나 보다. 골목이 들썩거릴 정도로 왁자지껄한 소리에 내다보니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당탕거리며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엄마 품에 안겨 버둥거리던 막둥이까지 합세를 하자 온 집안이 금방 시끌벅적,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머리 큰 녀석들은 집 안팎을 뛰어다니면서 넘어지고 뒹굴며 아우성을 치고, 작은 녀석들은 무엇이든 서로 갖겠다고 언성을 높이고, 손에 닥치는 대로 던지고 뒤집어엎던 막둥이는 마룻바닥을 오줌 바다로 만들어놓고 철벅거린다. 열두어 살부터 이제 막 걷기에서 뛰기로 노선을 바꾼 막둥이까지, 두세 살 터울의 남자아이들만 자그마치 다섯 명. 어디로 튈지 모를 아들 다섯을 맡겨놓고 발걸음도 가볍게 주말 데이트를 즐기러 나간 아들 내외는 해가 다 지도록 감감무소식이다.
허리가 아픈 할머니는 주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지땀을 흘린다. 주말마다 우르르 몰려오는 아들네 일곱 식구에게 먹일 별식을 준비하느라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엉덩이 한번 붙이지 못한다. 천방지축으로 들고뛰는 손자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할아버지도 숨 돌릴 틈이 없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들 때문인지(덕분인지), 혼이 쑥 빠져서 동동거리는 모양새에 주변 사람들이 다 혀를 끌끌 차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들어서면서부터 손자들 오니까 좋으시지요, 하던 며느리는 한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상 앞에 앉으면서, 아이들이 기운차게 뛰어노는 걸 보면서 묻고 또 묻는다. 힘은 들어도 손자들 보니까 좋으시지요? 그 말에 시어머니가 대답한다. 이제부터는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하루 점심만 먹도록 하자.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도 묻는다. 아버님, 손자들 보니까 좋으시지요? 시아버지가 대답한다. 전쟁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러거나 말거나 며느리는 개선장군 같다.
이들 젊은 부부는 아이들을 부모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고 생각하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일까. 어쩐지 나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노부부의 농담 같은 진담 속에서 웃음으로도 다 지우지 못한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들 대식구가 난리법석을 치다가 돌아가고 나면 만사 다 제쳐놓고 한나절쯤 누워있던 할머니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손자 손녀를 두고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손자들이 사랑스럽고 그런 손자들을 데리고 시부모를 찾아주는 아들 며느리가 더없이 고맙지만,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주방 가득 쌓여있는 설거지를 시작으로 태풍이 휩쓸고 간 것 같은 집안 구석구석 청소도 해야 하고, 잔뜩 어질러놓은 물건 정리에 지린내 나는 카펫도 빨아 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귀한 손자들과 함께한 짧은 기쁨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감내해야 할 후유증이 너무 크다.
어느 작가는 손자를 일러 노후의 축복이라고 했다. 그만큼 소중한 인연이 어디 있을 것이며, 그보다 감사할일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이가 가리킨다. 주말 내내 동동거린 고단함으로 온몸이 천근만근,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가운’ 현실 탓에 때때로 그 축복이 버겁기도 하다는 걸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일도 있으니.
나 역시 젊었을 때는 손자가 무슨 특효약인 줄 알았다. 그저 손자만 안겨 드리면 그게 최고의 선물인 줄 알았다. 손자 앞에서는 어디가 아픈 것도, 피곤한 것도 다 사라지는 줄 알았다. 손자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마냥 기쁘고 행복한 줄 알았다. 부모님도 불편할 수 있다는 걸, 부모님도 피곤할 수 있다는 걸, 부모님도 피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온몸으로 깨우친 게 있으니 우리 아들 며느리가 말하는 ‘인간 비타민’ 설이다. 우리 아들 내외 역시 그야말로 큰 효도라도 하는 듯 툭하면 “우리 갈게요~.” 하는데 그게 1박 2일이다. 정말 피곤해서 좀 쉬고 싶다고 해도 피로 회복에는 인간 비타민이 최고라며 손자를 앞세워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데 달리 피할 방법이 없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자 앞에서는 무장해제다. 맛있는 걸 먹이고 좋은 걸 해주고 싶은 게 세상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일 수도 있다.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아까울 것 하나 없는 손자 바라기가 되고 만다. 모처럼 아파트에서 벗어나 종횡무진 자유를 누리게 된 손자는 일당백이다. 마음껏 소리치며 뛰고 뒹굴던 손자 덕분에 조용하던 집안에도 활기가 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 손자가 돌아가고 나면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해야 할 일을 팽개친 채 맥을 놓고 앉아있노라면 인간 비타민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부모님의 손자 사랑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빙산의 일각一角을 떠받치고 있는 물밑 구각九角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이라니. 내리사랑이라는 말에 담긴 부모님의 고단함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새삼스레 마음이 저릿해오곤 한다.
그런 깨달음이 어디 손자를 위하는 일 한 가지뿐이겠는가. 큰 효도라도 하는 것처럼 나 좋은 시간에, 내 기분에 따라 행했던 일방통행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모님의 사정을 찬찬히 살필 줄 몰랐다. 맛있는 음식, 좋은 선물을 들고 가니까 우쭐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자식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월이 스승이라, 이렇게 뒤늦게, 어렴풋이나마 이제야 알겠다. 아버지 어머니도 쉬고 싶은 때가 있고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누리고 싶은 시간이 있다는 걸. 혹여 서운해 하지나 않을까 자식들 마음 살피고 배려하느라 당신들의 많은 것을 미루거나 접어두었다는 것을. 부처님 말씀처럼 “자신의 목숨이 있는 동안은 자식의 몸을 대신하기 바라고, 죽은 뒤에는 자식의 몸을 지키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으로 자식의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는 것을.
‘우리가 나이가 들어 음식을 흘리며 먹거나 옷을 잘 입지 못하더라도 이해해다오.
우리가 너희를 먹이고 입혔던 그 시간처럼. 우리가 나이가 들어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더라도 부디 끊지 말고 들어다오. 너희가 어렸을 때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이야길 해 달라고 졸라도 기꺼이 응했던 우리처럼.’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의 한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부모의 시간은 매 순간순간 쇠락을 향해 가고 있다. 비할 데 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한도 초과가 버거운 나이, 맞춤형 효도가 필요한 때다. “마음은 모든 것이다. 우리는 생각한 대로의 사람이 된다.”라는 부처님의 말씀 속에 더 좋은 자식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