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커피 한 잔에 담긴 인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0-31 12:55 조회6,232회관련링크
본문
커피 한 잔에 담긴 인연
“가비를 볶을 때는 과일이나 꽃향기가 섞여 나고, 뜨거운 물에 우려낼 때는 은은한 향을 내면서 고소한 향이 납니다. 연하게 볶으면 향은 살아나지만 맛이 복잡해지고, 진하게 볶으면 쓴맛이 깊어집니다. 가비는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내리는 것이며, 향이 천천히 퍼지도록 인내하며 적셔야 합니다.”
커피 하면 영화 <가비>에 나오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의 대사와 함께 1986년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7개 부문을 휩쓴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떠오른다.
20세기 초반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지대 케냐의 나이로비를 무대로 한 이 영화의 압권은 최고급 커피가 생산되는 마사이와 킬리만자로의 멋진 풍광이다.
이와 함께 커피농장이 어떻게 일구어지고, 커피 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커피의 재배ㆍ수확ㆍ가공ㆍ포장에 이르는 전 과정을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것도 매력이다. 하얀 커피 꽃이 피고, 커피 체리가 맺히고 익어가는 과정, 앵두처럼 빨간 커피 체리를 일일이 손으로 수확하는 순박한 흑인 노동자들의 모습, 물을 이용해 커피 체리를 벗겨 씻어내는 워시드washed 가공 방식, 원두를 부대에 담아 수출하기까지의 전 과정이 흥미롭다.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을 가득 메운 검은 들소 떼, 초원을 누비는 기린의 무리,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홍학의 화려한 군무, 작고 빠른 영양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 등 목가적인 풍경에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가 잔잔하게 흐르는 이 영화의 배경 아프리카 케냐를 대표하는 커피는 케냐 AA와 에스테이트 케냐로, 묵직한 바디감과 오묘한 과일 향, 산뜻한 신맛의 조화가 뛰어나 세계적인 최고급 커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왕 시작했으니 커피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기로 하자. 커피는 원종(아라비카, 로부스타, 리베리카 등)이나, 생산지, 추출 방식(터키식 침출 법, 핸드 드립, 기계 드립, 모카포트, 프렌치 프레스, 싸이 폰 등), 첨가물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게 구분되고 맛에도 차이가 난다.
커피 메뉴의 대부분은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원두커피, 카페라테를 기본으로 만들어진다. 에스프레소는 기계를 이용해서 고온ㆍ고압으로 단번에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이 적고, 맛과 향이 진하다.
이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커피의 대명사와 같은 아메리카노가 되고, 우유 거품을 얹어 계피나 코코아 가루를 뿌리면 TV 드라마의 거품 키스로 유명세를 치른 카푸치노, 초콜릿을 더하면 카페 모카, 에스프레소와 뜨거운 우유를 1:4로 섞으면 카페라테가 된다.
아메리카노에 차가운 휘핑크림을 듬뿍 얹은 비엔나커피는 커피의 쌉싸래한 맛과, 휘핑크림이 녹으면서 진해지는 단맛이 포인트. 휘핑크림을 젓지 말고 음미해야 한다. 에스프레소에 점찍듯이 데운 우유를 한 스푼 살짝 올리면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데운 우유에 에스프레소 한 잔을 얹으면 라테 마키아토, 라테 마키아토에 캐러멜 소스를 첨가한 것이 캐러멜 마키아토이다.
에스프레소에 휘핑크림을 얹으면 마키아토와 비슷하지만 단맛이 강한 콘 파나가, 긴 유리잔에 에스프레소를 담고 얼음과 설탕 시럽을 얹으면 아이스커피의 일종인 카페 프레도가, 초콜릿 시럽을 뿌리고 우유 거품을 얹으면 카페 토리노가 만들어진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더하면 멋스러운 아포가도가 된다.
또 다른 추출 방식으로 핸드 드립 커피와 더치커피를 들 수 있다. 핸드 드립 커피는 분쇄한 커피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내리는데 커피 고유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
더치커피는 커피에 찬물 또는 상온의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추출하는 과정이 눈물 같다고 하여 ‘천사의 눈물’이라고도 하고, 숙성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커피의 와인’이라고도 한다. 커피의 쓴맛을 없애고 좋은 맛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맛과 향으로 우리 삶에 여유를 더해주는 커피의 낭만과 달리 커피의 역사는 착취와 수탈의 역사라는 이면을 갖고 있다.
커피 재배는 사람 손이 많이 가고 혹독한 노동을 필요로 한다. 흑인 노예의 가혹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커피가 ‘니그로의 땀’이라 불렸으며, 지금도 여전히 ‘커피 벨트’ 지역의 노동자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커피는 세계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이고, 가격도 그리 싸지 않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커피 생산국은 가난한 나라가 많다. 지나치게 낮은 생산 원가 때문에 어른들은 물론이려니와 어린이들도 노동 현장에 내몰린 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예가 허다하다. 중간 매입상과 다국적 기업들이 중간에서 엄청난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제값을 지불한다.’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정무역이다. 공정무역은 생산자와 사업자의 상생을 목표로, 국가와 기업 등이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하는 무역을 말한다. 차 떼고 포 떼고 간단명료하게 이야기하자면 적정한 가격을 지불함으로써 노동 착취를 막고,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착한 소비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3년 9월 ‘아름다운 가게’에서 공정무역으로 아시아 지역의 수공예품을 수입ㆍ판매를 시작해 커피ㆍ코코아 등으로 그 폭을 넓혀 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 만물은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엮여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선을 존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이야말로 사람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친 땅을 일궈 비옥하게 하고 나무를 심어 살찌우며 잘 익은 커피 체리를 일일이 손으로 따고 손질해 한 톨 한 톨의 커피콩으로 생산해내기까지, 그리고 그것이 한 잔의 커피로 우리 앞에 놓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더해졌을지,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인연 또한 어느 한 가지라도 허투루 여길 수 없다.
아름다운 동행이 커피 꽃처럼 활짝 피어나 튼실한 커피콩을 맺고, 향기로운 한 잔의 커피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의 수고가 만들어낸 따뜻한 인연을 마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