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이야기 | 처신에 대한 계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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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2 14:02 조회5,96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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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신에 대한 계율(3)
계를 배우라고 권하는 말을 거역하지 말라
지계권학(持戒勸學). 계를 지키고 배우기를 권한다는 말이다. 지계는 수행자의 근본이며 계를 배우는 것은 수행의 시작이며 과정이다.
따라서 계를 지키지 않고, 계를 배우지 않는 것은 마치 나뭇잎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머리가 잘려 나가는 것과 같으며, 돌이 둘로 쪼개지는 것과 같음을 여러 『율장』에서 비유하고 있다. 두 번 다시 합치고 붙일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계를 지키라고 권하는 말을 거역하는 것은 스스로 수행자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수행자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계를 지키라고 권하는 말을 거역해서는 안된다.’는 계율을 정하셨다. 이를 거권학계(拒勸學戒)라고 한다. 거권학계의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사분율』의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코살라 동산에 계실 때 찬타카 비구가 대중의 충고를 법답게 받아들이지 않고 계율 배우기를 소홀히 하였으므로, 부처님은 크게 꾸짖어 다음과 같이 계를 제정하셨다.
“어떤 비구가 다른 비구들이 법답게 충고할 때에 이를 거역하고 ‘나는 이 계를 배우지 않겠소. 지혜 있고 계를 지키는 다른 비구에게 묻겠소.’라고 말한다면, 이는 바일제이니라.”
지계는 결국 스스로 지키려고 하는 의지력이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지켜지는 측면도 있지만, 결국 자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행하는 바가 오직 자신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를 배워서 익히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 있다.
배움에는 먼저 스승에 의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배운 후에 스스로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습이라 한다. 계를 지키는 것 못지않게 계 배우기를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자(自恣)와 포살을 정기적으로 열었던 것이다.
계율을 비방하지 말라
계를 지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 것은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지만, 더욱 바르지 못한 것은 계를 비방하는 것이다. 계를 비방하는 것은 부처님과 윗스승을 비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계율을 비방하지 말라는 계를 훼비니계(毁毘尼戒)라 한다. 이 계가 제정된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사분율>의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여러 비구들이 한 곳에 모여 바른 법을 외우고 계율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때 육군비구들이 의논했다.
“저들이 필경 저 법과 계율을 외우고 나면, 우리들의 잘못을 지적하리라. 그러니 우리 함께 가서 저들에게 충고하여 외우지 못하도록 하자.”이렇게 의논한 뒤에 그들은 그곳에 가서 말했다.
“대덕이시여, 이 복잡한 계율을 외워서 무엇 하겠습니까. 외우려면 네 가지 무거운 죄[사중죄]나 외우시오. 기어코 외우려 하거든 네 가지 중한 죄와 열세 가지 승잔죄를 외우시오. 왜냐하면 그대들이 외우고 나면, 여러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오.”
이 소문을 들은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계를 제정하였다. “어떤 비구가 계와 법문을 들을 때에 ‘대덕이여, 무엇하러 이 복잡한 계율을 외우는가. 이 계를 언급하면 여러 사람이 걱정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면, 계를 경멸하고 헐뜯는 것이므로 바일제가 되느니라.”
자기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오히려 계를 비방하고, 계를 외우는 것을 훼방하고 있다. 이를 하지 말라는 계가 훼비니계(毁毘尼戒)다. 계를 지키지 않고 배우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비방하고 훼방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그런 점에서 바일제가 아니라 치탈도첩의 멸빈(滅擯)으로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주위에서 가르침을 비방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가르침에 대해 배우려는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한다. 마냥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수행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함께 논의를 하고 나서 나중에 비난하지 말라
어떤 회의이든 간에 논의를 하고나서 나중에 딴소리를 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논의 때는 아무 소리를 하지 않다가 논의가 끝나고 모두 결정된 뒤에 반대하는 경우가 그렇다. 또 논의 때는 찬성과 동의를 해놓고 논의가 끝난 뒤에 반대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승가에서 논의의 절차를 갈마(羯磨)라고 한다. 승가에서든 기업에서든 논의과정은 기준과 원칙이 있고, 상식과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민주적인 절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일방적인 결정과 독선, 독재는 건전한 회의가 될 수 없고, 건강한 회의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논의 과정은 다양한 의견 개진과 진지한 경청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결정에 승복하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결정에 대해 비난하거나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정된 사항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다른 결정이나 반대의견 또한 공정성과 합법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마를 통해 결정된 대중의 의견을 비난하지 말라고 하셨다.
승가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계를 ‘동갈마후회계(同羯磨後悔戒)’라 한다. 함께 논의를 한 후에는 비난하지 말라는 계다. 동갈마후회계(同羯磨後悔戒)의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사분율>의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실 때에 푸트라 비구가 대중에서 뽑혀 대중의 평상과 자리, 침구정리와 관리의 소임을 맡게 되어 대중들에게 음식도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중의 소임을 보느라 대중이 밖에서 방을 짓거나 우물을 파거나 모임이 있을 때도 동참하지 못하고, 대중의 소임을 보느라 그가 입은 옷은 때가 끼고 헤어지고 더럽고 깨끗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함께 논의[갈마]를 하여 그에게 좋은 옷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육군비구들이 자기네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면서 “친분에 따라 좋은 옷을 해준다.”고 비난하였다.
이 소문을 부처님께서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계를 제정하셨다.
“어떤 비구가 함께 논의를 하고나서 뒤에 말하기를 ‘비구들이 친분에 따라 대중의 물건을 주었다’고 비난하면 바일제가 되느니라.”
충분한 논의는 당연히 필요하다.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 결정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의논할 때 자리에 없었다고 해서, 또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반대하거나 뒤에서 비난하는 것은 수행자로서 바른 자세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구업을 짓는 것이다.
사람은 무릇 처신(處身)을 잘 해야 한다. 처신은 처세(處世)를 잘 하는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을 조심을 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처신(處身)은 정도正道요, 처세(處世)는 바르지 않은 길이다. 처신은 삼업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즉 수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