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이야기 | 처신에 대한 계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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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1-28 14:32 조회6,22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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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을 다시 일으키지 말라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라는 말이 있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는 한 번 처리된 사건은 다시 다루지 않는다는 법의 일반원칙이다. 이는 형법상에 적용된다.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는 어떤 회의의 의사과정에 있어서 그 회기 중에 부결된 의안은 다시 제출하지 못한다는 의사의 일반원칙이다. 이는 이미 의결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다시 논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일사부재의는 국회법에 규정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6군 비구들이 이미 싸움을 한 뒤에도 잘 풀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여 대중에 없던 싸움이 생기고 이미 생긴 싸움은 좀처럼 없어지지 아니 하였다.
이에 승가의 갈마에서 여법하게 의결하였는데도 결정된 일에 불만을 가지고 “갈마는 부정하게 행하여졌다. 갈마를 다시 해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다. 이 사실이 부처님께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계를 제정하였다. “만약 어떤 비구가 승가에서 쟁사를 여법하게 행한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다시 일으키면 바일제가 되느니라.”
6군 비구가 여법하게 끝난 쟁사(諍事)를 익히 알면서도 문제 삼고 다시 쟁사를 행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는 일종의 몽니를 부리는 것과 같다.
승가에서는 한 번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승가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함이다. 단, 여기에는 반드시 여법하게 행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법과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25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유효하게 적용되는 부분이다.
여법(如法)이란 <팔리율>에서는 ‘법에 의해, 율에 의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행해진 경우’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법하지 않다는 것은 곧 갈마의 무효를 의미하며 이는 무죄(無罪)임을 뜻한다.
따라서 쟁사는 반드시 여법하게 진행되어야 하고, 여법하게 결정된 쟁사는 다시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승가의 발쟁계(發諍戒)다.
비단 쟁사뿐만이 아니다. 각종 회의에서 한 번 결정된 사안은 번복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공식기구에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결정한 사항을 몇몇 사람이 다시 문제 삼아 번복하는 일은 정당한 갈마도 아니요 법다운 승가라고 할 수도 없다. 특히 적법한 절차인줄 알면서 다시 거론하는 일은 계율의 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바른 수행자의 행이라 할 수 없다. 이는 6군 비구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이의제기는 공식 절차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비선(秘線) 또는 비공식적으로 야기되어서는 안 된다. 즉 공식기구를 통해서 정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는 2500 여 년 전의 승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승가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청규(淸規)라 할 수 있다. 친소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여법하게 처리해야 함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승가의 쟁사(諍事)는 율장에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4종 쟁사는 언쟁(言諍), 비방쟁(誹謗諍), 범죄쟁(犯罪諍), 상소행사쟁(常所行事諍)이다.
첫째, 언쟁(言諍)은 교법이나 계율의 해석에 관한 쟁론이다. 종단의 교리나 불사법요, 계율 등 교상(敎相)과 사상(事相)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데, 기구에서 논의를 거쳐 정해진 법요(法要)나 교리는 본인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否定해서는 안 된다.
둘째, 비방쟁(誹謗諍)은 교계쟁(敎誡諍)이라고도 하는데, 청정비구를 두고서 ‘계를 깨뜨렸다, 사견邪見을 가졌다, 부정한 행위를 한다.’고 비방함에 따라 일어나는 다툼이다. 이는 모함과 중상모략과 같다.
셋째, 범죄쟁(犯罪諍)은 실제로 파계한 비구를 고발했을 경우에 일어나는 쟁사이다. 즉 죄가 있는 비구를 갈마에 붙였을 때 일어나는 다툼을 말한다.
넷째, 상소행사쟁(常所行事諍)은 다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구들이 일상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포살이나 자자 등을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행하지 않았을 때 갈마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들 4종 쟁사는 출가수행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고 정해져 있는 계율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다툼이다. 의무를 다하고 계를 철저히 지킨다면 일어나지 않는 다툼이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불법을 홍포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입장이라면 이미 결정된 사안임을 알면서도 뒤에서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올바른 행이 아니며 수행자의 도리가 아니다.
나쁜 소견에 대해 충고하는 것을 거역하지 말라
나쁜 소견이나 삿된 말 하는 것을 충고하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충고를 거역해서는 안 된다. 이를 악견위간계(惡見違諫戒)라 한다. 나쁜 소견을 충고하는 것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계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출가 수행자가 애욕(愛欲)에 빠져 있어도 부처님이 설한 수행과 실천에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궤변을 늘어놓고, 다른 비구들이 삼갈 것을 충고하여도 따르지 않는 죄다. 악견위간계(惡見違諫戒)의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사분율>의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아이타 비구가 나쁜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를 음욕을 범하여도 도법(道法)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다른 비구 도반들이 충고를 하였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그러나 아이타 비구는 끝끝내 고집했다. 이로 인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계를 제정하였다. “만약 어떤 비구가 말하기를, ‘나는 부처님이 설하는 바 음욕을 행하여도 도법에 장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마땅히 그 비구에게 이렇게 충고해야 한다.
‘그런 말을 마시오. 부처님을 비방하면 좋지 않소.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소. 부처님은 무수한 방편으로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행하는 것은 도법을 장애하는 것이라고 하셨소.’라고 말해야 하나니, 그 비구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거든 세 번까지 충고하라. 세 번까지 충고해서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일제이니라.”
정법을 왜곡하고 궤변을 늘어놓는다면, 마땅히 충고해야 한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악견을 늘어놓는다면 이 또한 간언(諫言)하고 직언直言을 해야 한다. 궤변과 악견은 바른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