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늙은이 &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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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2 14:03 조회5,66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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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 & 어르신
아내 자랑, 자식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팔불출이라는 말에 이어 늙은이 삼불출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쪼개 쓰고 아껴 쓰는 것도 모자라서 받은 연금으로 장기적금 붓는 늙은이, 있는 재산 없는 재산 자식 입에 털어 넣고 용돈 한 푼 얻어 쓰지 못한 채 지지리 궁상떠는 늙은이, 젊어서 한눈판 것도 모자라 돈 힘으로 바람피우다가 이혼 당하는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웃자고 하는 얘기겠지만 상당 부분 수긍이 간다.
여기에 몇 가지 불출을 덧붙여 보기로 한다. 나이를 훈장처럼 내세우면서 어른 대우받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늙은이, 간에 붙을까 쓸개에 붙을까 눈치 백단에 변신도 무한도전급인 늙은이, 앉을자리 누울 자리 분간 못하고 낄 데 안 낄 데 휘젓고 다니며 온갖 참견 다 하는 늙은이, 보신 음식에 목숨 걸고 모모한 약을 상비약처럼 넣고 다니며 의기양양해 하는 늙은이, 벽을 문이라고 내미는 황소고집에 인색하고 탐욕스럽기가 하늘을 찌르는 늙은이, 딸과 며느리가 같은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시媤 월드world의 횡포를 자행하는 늙은이, 의무는 나 몰라라 권리만 주장하면서 자식이 화수분이라도 되는 양 당당히 손 벌리는 늙은이….
참으로 슬픈 모습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슬픈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그 모습에서 문득문득 그리 머지않은 내 모습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7부 능선쯤에 올라서고 보니 젊어서는 볼 수 없었던 그것들이 보인다. 나도 저렇게 늙으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 다짐도 하게 된다.
그들도 한때는 가정과 사회를 위해 숨차게 달렸을 터. 이제 그 막중한 책임과 의무로부터 놓여나 유유자적, 인생을 즐겨야 할 나이에 스스로 굴레를 만들고 편견과 아집의 누에고치를 지어 그 안에 자신을 가둔 채 쓸모없는 늙은이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분명 열정으로 빛나던 청춘이 있었을 것이다.
젊고, 힘차고, 뜨거웠던 시절, 그들 또한 추레하고 비굴하게 늙어가는 사람들을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과, 그렇게 늙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이 경멸했던 그 모습 그대로 나이를 더해가고 있다.
누구인들 멋지게 늙어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여유롭고 품위 있게,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는 노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희망사항이자 풀어야 할 숙제이다. 세계적인 석학과 문호들이 멋있게 늙기, 아름다운 종말에 대해 그리도 많은 이야기를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본받고 싶은 모습도 있다. 내가 아는 그분은 늘 웃는 얼굴이다. 팔순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언제나, 먼저 허리 숙여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항상 유순한 존댓말이다. 밥집을 가든 찻집을 가든, 사람이 많든 적든, 미리 선수를 치거나 힘 싸움을 벌이지 않는 한 십중팔구, 계산대를 접수하는 건 그분이다.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것처럼, 젊은 사람에게는 베풀어야 한다는 지론에서다. 10년도 넘었다는 회색 양복 안주머니에서 나오는 지갑은 가죽이 닳아 날깃날깃 하지만 돈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고, 생색 또한 내지 않는다.
그분의 직업은 장(欌)이나 농(籠), 문갑, 사방탁자 같은 것을 만드는 소목장小木匠이다. 젊어서처럼 큰 장롱 같은 것은 만들지 못하지만 지금도 그분은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공방에 들어가 나무를 다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용도가 각기 다른 톱과 대패, 변탕, 골밀이 등에서부터 장도리, 송곳에 이르는 수많은 연장을 호위병처럼 거느린 채 나무 성질에 맞게, 나무의 결과 무늬를 살려가며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분의 모습이 바위처럼 묵직하다.
자존심만큼이나 그분의 작품은 비싸다. 하지만 돈 대신 마음만 받고 작품을 내주는 일도 종종 있다. 그 파격이 물처럼 유연하기도 하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못 본 듯, 못 들은 듯 너그럽고 관대하게 베풀고 배려하는 그분을 나는 늙은이가 아닌 어르신이라 지칭한다.
누구나 늙은이가 된다. 하지만 아무나 어르신이 되는 건 아니다. 어른다운 어르신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늙는다는 것은 삶의 연륜이 깊어지는 일이다. 안단테andante에서 아다지오adagio로 넘어가는 인생 악보가 연주해내는 아름다운 화음에는 젊음이 흉내 낼 수 없는 다채로운 경험과, 세월을 통해 터득한 직감,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 지혜가 가득하다.
얼마나 더 살 것인가에 집착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 쓸데없는 참견 대신 후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 남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지 않고 혼자 힘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뒤에 올 많은 이들에게 거울이 될 수 있는 사람, 바로 지금 진심으로 “I'm happy!"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르신이다.
석양이다. 아름다운 인생 2막, 늙은이로 남을 것인가, 어르신이 될 것인가. 그 답을 알면서도 생각과 행동이 따로 국밥일 수밖에 없는 건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늙어간다는 건 사람을 이해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그만큼 깊어져야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거울 앞에 자신을 세워볼 일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추레하게 늙어가는 늙은이가 아니라, 석양 아래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아름다운 어르신임에 틀림없다.
<본생담>에 이르기를 ‘초대하지 않았어도 인생은 저세상으로부터 찾아왔고 허락하지 않아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간다. 찾아왔던 것처럼 떠나가는데, 거기에 무슨 탄식이 있을 수 있으랴.’라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삶에 대해 ‘다만 모를 뿐’이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가 어찌 인생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인생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헛된 것에 집착하느라 진실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다운 순간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늙은이가 아닌 어르신으로 늙어가는 싶다는 열망이 큰 건 이 미련한 눈이 아직 어르신을 알아볼 경지에 이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