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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 업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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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10-05 15:07 조회1,9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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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의해서입니다. 정자와 난자에 포함되어 있는 유전적 성질이 자식들에게도 이어져 얼굴 모양이나 신체적 특징들이 희한하게도 자식들에게 이어집니다. 부모를 닮지 않은 자식은 좀처럼 보기어렵습니다. 아버지 쪽을 많이 닮거나 어머니 쪽을 많이 닮는 경우는 있어도 영 동떨어진 모습의 자식이 태어나는 일은 드뭅니다. 간혹 부모를 닮지 않은 자식도 더러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쪽을 닮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끔은 이러한 특징이 잘 버무려져서 외양이 훌륭한 자식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모양뿐만 아니라 성격에서도 그러한 부모나 윗대의 특징들이 이어집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업의 에너지가 정자와 난자를 매개로 하여 나타난다는 것은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이러한 유전자만으로는 설명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정자와 난자를 통하여 부모의 유전적 특징이 자식에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동시에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성질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부모는 그렇지 않은데 어떤 경우에는 자식이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그렇지 않은데 자식은 난폭한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것을 전생을 통하여 누적된 업의 힘, 즉, 업력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만 하더라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로부터의 생식 세포에 의하여 유전자를 물려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조상들을 살펴보면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 그와 비교할 만한 조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자신은 왕실의 혈통이 아니라 성스러운 붓다의 혈통이었습니다.

 불교에는 부처님께서 이번 생에서의 노력뿐만 아니라 과거세의 수많은 공덕으로 부처의 몸을 이룬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부모의 생식세포와 유전자는 우리의 탄생에 절대적인 요소이며 매개체이지만 그 속에는 업력이 숨어있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업력에 따라 아름답고 추하며 건강하고 나약함, 좋은 환경과 열악한 환경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생물학적 특징은 이어받지만 그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조금만 관찰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차별을 업력의 차이로 해석하는 것이 불교이지만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과거의 업에만 돌리지는 않습니다.

 업력은 중요하지만 불교 철학에 기술된 24가지 인과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힌두교 등에서도 업을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업은 인간을 속박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철저한 계급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과거의 업에 의하여 어떤 특정한 계급에 태어나는 사람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스라이팅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숙명론입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모든 행복, 슬픔 또는 중립적인 감정이 경험되는 것은 모두 이전의 어떤 행동에 의한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전의 행동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살인자, 도둑, 추악한 자, 거짓말쟁이, 비방하는 자, 수근거리는 자, 탐욕스러운 자, 악의에 찬 자, 비뚤어진 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이전의 행위를 근본 원인으로 삼는 자에게는 하려는 욕구도, 하려는 노력도, 이 일을 해야 할 필요성도, 저 일을 삼가야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증일아함경』

 이러한 말씀은 모든 신체적 상황과 정신적 태도가 오로지 과 거의 업에서 비롯된다는 믿음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이 업이라는 굴레에 묶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지진이나 태풍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동시에 죽게 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이 지은 업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업의 작용에 대하여 인간의 의지로서 형성되는 업과 자연과학적, 물리적 업의 형성 등에 대해서는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재해가 나는 곳에 가 있었던 자기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행위라는 업력에 의하여 전적으로 자연재해를 당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업력 불가사의’라고 하여 완전히 깨달은 붓다만이 그 업력의 모습을 바로 본다고 했겠습니까?

 만약 현재의 삶이 우리의 과거의 행동에 의해 완전히 조건화 되거나 완전히 통제된다면, 업은 확실히 운명론이나 사전 결정론과 같게 되어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유 의지는 터무니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삶은 프로그램화된 기계적 조작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미래를 지배하는 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든, 아니면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과 관계없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삶의 과정을 통제하는 거부할 수 없는 과거의 업에 의해 창조되었던지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며 유일한 차이점은 신(God)과 업(Karma)이라는 두 단어에 있다고 해야지요.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두 힘의 궁극적인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신의 힘이나 힌두교의 업은 숙명론, 혹은 결정론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의지나 행위가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신의 예정대로 살아야 한다든지 과거의 업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숙명론이나 태어난 연월일시에 의하여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주나 명리 등의 결정론을 불교는 배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적인 틀은 과거의 생각이나 행위에 의한 업력에 좌우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업력에 개입하는 물리적, 자연적 요소들도 일부 작용을 하기 때문에 자연재해등에 의하여 피해를 입는 경우 그것을 반드시 업력만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업을 형성하는 것은 대부분이 우리의 생각과 행위에 의한 것이므로 항상 선업을 축적하여 악업의 형성을 막고 미래의 불행을 방지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업은 즐거운 과를 낳고 나쁜 업은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선인낙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라는 업의 성질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미래를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