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야기 | 오리무중을 즐기다 - 안개초–Baby’s br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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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2 14:29 조회5,50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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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을 즐기다 - 안개초–Baby’s breath
척박해도 좋아요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물을 사 마시는 게 흔한 일이 되었지만, 한 20년 전쯤 유럽에 다녀온 사람들은 그때부터 물 사 먹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물속에 석회 성분이 많기 때문에 그냥 먹으면 배탈이 난다는 것이었지요.
유럽의 물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유럽 대륙의 지층에 석회질이 많기 때문입니다. 석회질 토양은 바다 플랑크톤이나 조개 등의 화석이 퇴적되어 만들어지는데, 지하수가 이 토양을 거치면서 물속에 석회 성분이 남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즐겨 마시는 와인. 그 와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 열매는 기름지고 비옥한 일반 토양보다 딱딱하고 척박한 석회질 토양을 좋아합니다. 석회질 토양에서 만들어진 포도 열매만이 최고의 와인 맛을 낼 수 있지요.
향기로 우리 삶을 즐겁게 해 주는 허브 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이지, 히솝, 라벤더, 레몬밤, 마조람, 로즈마리, 타임 등 많은 허브 식물도 남유럽의 석회질 토양이 고향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이지만, 허브 식물은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아름다운 향기를 마음껏 만들어 냅니다.
넉넉하고 푸근한 느낌 가득
안개초. 이 식물 또한 포도나무나 허브 식물들처럼 석회질 땅을 좋아합니다. 학명 ‘집소필라Gypsophila’에서 ‘Gypso’가 석회를, ‘phila’가 사랑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므로, 안개초가 석회를 사랑하는 식물이란 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안개초에는 한해살이풀과 여러해살이풀,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코카서스 지역이 고향인 한해살이 안개초가 한 번 꽃이 핀 다음 시들어 버리는 반면, 지중해 연안이 고향인 여러해살이 안개초는 하얗고 작은 꽃을 매년 같은 시기에 피웁니다.
이 두 종류 가운데 우리에게 더 친숙한 쪽은 여러해살이 안개초입니다. 꽃꽂이나 꽃다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개초가 바로 이것인데, 가늘고 여려 보이는 가지에 다닥다닥 꽃이 붙어 있는 모습은 이름 그대로 뿌연 안개 속을 떠오르게 합니다.
저는 가끔 아이들과 안개초로 수업을 할 때마다 이 꽃의 이름이 왜 안개초인지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꽃이 모여 있는 모습이 안개 같아서요.”라고 대답하는 아이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합니다. 그러면 저는 안개초 다발을 아이들의 얼굴에 바싹 대 주고, 뭐가 보이는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느껴 보도록 합니다.
아이들은 갑자기 눈앞이 뿌예지니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서서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안개초를 받아들입니다.
안개초로 꽃꽂이도 하고 꽃다발도 만들면서 안개초가 만드는 ‘안개’를 즐깁니다. 저는 안개초 수업을 할 때는 대개 다른꽃과 섞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래야만 안개초의 진짜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입니다. 물론 안개초가 꽃꽂이나 꽃다발에만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식물들처럼 화분에 심어도 꽤 보기 좋습니다. 꽃꽂이나 꽃다발 속 안개초만큼이나 화분 속 안개초도 넉넉하고 푸른한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인생에는 표지판이 없지만
안개초에 살며시 얼굴을 대어 봅니다. 촉촉하고 푹신한 안개 방울들이 입과 코를 스쳐 지나갑니다. Baby’s breath란 영어 이름처럼 아기의 숨결이 얼굴을 간질이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얼굴을 간지럽히던 그 숨결을 바라봅니다. 어느새 안개초는 얼기설기 복잡한 선들로 모양을 바꾸었습니다. 아기의 숨결은 사라지고, 온통 풀과 나무뿐인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리무중’이란 말은 바로 이런 안개의 숲을 보고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오리무중이기는 안개초 속이나 우리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행 그 어디에도 방향 표지판이나 신호등이 없으니까요. 왼쪽으로 가면 낭떠러기가, 오른쪽으로 가면 막다른 길이 우리를 기다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상상해 보세요. 석회질 토양은 사람이 마시는 물을 만드는 데는 최악의 조건이지만, 식물들이 훌륭한 맛과 향을 내는 데는 최고의 조건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여서 막막하고 두려운 안갯속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내딛습니다.
앞쪽으로 천길만길 낭떠러지이면 어떻습니까? 살짝 디뎌보고 옆으로 가면 되지요. 옆쪽이 막혀 있으면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뒤돌아 가면 됩니다. 짙은 안개, 오리무중이야말로 가족의 진한 사랑을 느끼고 생명의 숨결을 키워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