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그래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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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2 14:21 조회5,36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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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봄!
봄이다. 느낌으로 먼저 와서 여린 빛깔로, 아련한 향기로 피어나는 봄. 사방이 온통 꽃 천지다. 부신 햇살 아래 길을 나선다. 온몸에 와 감기는 바람이 온통 봄이다. 무장 해제다. 이런 날은 봄을 따라나설 수밖에. 봄을 찾아가는 길… 느릿느릿 쉬엄쉬엄,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꽃향기도 맡으며.
오죽헌(烏竹軒) 초입,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은행나무가 연둣빛 여린 움을 틔우는 길을 따라 들어선 오죽헌 마당. ‘이득을 보았으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율곡 선생 동상 옆 표석에 새겨진 가르침이 마음의 빗장을 연다.
자경문(自警門)을 지나면서 율곡 선생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자경문(自警文)을 다시 생각한다. 가까이 있어서 친근하지만 그래서 잘 알지 못하는 곳이 오죽헌이고, 문성사(文成祠)다. 율곡 선생이 나고 자란 공간 오죽헌은 작고 아담한 전통한옥이다.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는 대학자의 궤적을 찾는 많은 탐방객들이 ‘도덕과 학문이 막힘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전한 삶을 위해 정사의 근본으로 삼았던’ 선생의 위업을 추앙하는 곳이다.
딱 이 즈음이면 오죽헌을 그윽하게 물들이는 향기가 있다. 천연기념물 484호, 율곡매(栗谷梅)라는 이름의 홍매화다. 1400년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령 600여 년의 이 나무는 유독 매화를 좋아했던 사임당이 매우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몇 해 전 기록적인 폭설에 가지가 부러지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해마다 연분홍 꽃망울을 터뜨리는 홍매화가 혹시나 사임당이 고매도(古梅圖), 묵매도(墨梅畫)에 피워냈던 매화의 환생은 아닐는지.
오죽헌의 앞마당을 지키는 배롱나무도 율곡매와 나란히 나이를 먹었다. 뒤뜰의 율곡매가 꽃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맺기 시작할 때쯤, 강릉시의 시화이기도 한 이 나무는 사임당의 자취인 듯, 서서히 붉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문성사 오른쪽에 선 두 그루의 율곡송(栗谷松)에도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율곡 선생이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의 식물이라며 “한참 바라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 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예찬을 했다는 노송이 묵묵히 세월을 지키고 있다.
오죽헌에서 길 하나를 건너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공방 길에는 창작인들이 모여 작업을 펼치는 공간답게 아기자기한 작품이 즐비하다. 잇닿은 곳이 강릉 창작예술인촌이다. 이곳에는 바이올린 제작을 비롯해 목공예ㆍ천연 염색ㆍ비즈공예ㆍ닥종이 인형 등 20여 명의 공예작가들이 입촌해 있어 볼거리도 많고 체험거리도 다양하다.
이곳 2층에 자리 잡은 동양자수 박물관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전통자수를 중심으로 동양자수의 미적 세계를 체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조각보, 서양자수와 독창적인 규방예술로 극찬 받고 있는 강릉 자수도 전시되어 있으며, 귀가 올라온 강릉 고유의 강릉 주머니도 만들어 볼 수 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코로나19로 나라 안팎이 온통 어지러운 시국에 웬 꽃노래냐고 지청구를 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의 얘기는 몇 년 전에 썼던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니 널리 이해해 주시길. 새 움이 트고, 매화며 영춘화며 진달래, 개나리가 피는 봄이 왔지만 계절의 아름다움마저 퇴색하게 하는 이 우울한 사태를 어찌할 것인가.
분명,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는 시절이 있었거늘.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햇살, 연둣빛으로 피어나던 들판, 바람결에 실려 오던 연분홍색, 노란색 꽃향기, 재잘재잘 깔깔깔 소풍 길에 나섰던 병아리 같은 아이들…. 그리운 마음에 다시 강릉의 봄을 더듬어 본다.
강릉 하면 바다가 으뜸이다. 더군다나 봄빛을 머금어 투명한 연둣빛으로 물드는 강릉 바다를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강릉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래시계>로 유명한 정동진과 수로부인의 전설을 간직한 헌화로의 비경을 잇는 힐링 트레킹 탐방로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꼭 해안도로를 타고 가야 제맛이다.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은 2,3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동해가 열리면서 파도에 깎여 편평해진 해안이 지반과 함께 솟아올라 형성된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에 놓인 약 2.86㎞의 덱 길이다. 탁 트인 동해의 풍광과 웅장한 기암괴석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강릉의 산간 오지로 꼽히는 왕산면에는 안반데기와 모정탑길이 있다. 쏟아지는 별, 푸르게 펼쳐진 배추밭, 새벽안개를 뚫고 붉게 떠오르는 태양…. 산이 배추밭이고 배추밭이 산이 되는 곳, 너무 높아 구름도 쉬어 간다는 하늘 아래 첫 동네, 안반데기. 해발 1,100m에 위치한 이곳은 떡메로 떡을 치는 안반처럼 우묵하면서도 널찍한 지형이라 안반데기라고 불린다.
경사가 심해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 화전을 일구고 소를 몰아 밭을 갈았다는 안반데기는 우리나라 고랭지 배추 경작지 중 가장 넓은 곳이다. 긴 겨울의 끝에 오는 안반데기의 봄은 짧다.
6월에 배추 모종을 심어 8월이면 출하를 하는데 45도 정도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배추밭의 초록 물결이 장관이다. 산 능선을 따라 늘어서서 그리움인 양 날개를 돌리고 있는 풍력발전기도 경이로운 풍경이 되어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모정탑길이 있다.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 숲을 왼쪽에 두고, 송천을 따라 걷노라면 모정탑길이 시작되는 계곡에 다다른다. 모정탑길은 거듭해서 자식들의 비운을 겪던 차옥순 할머니가 26년간 산속에 홀로 기거하면서 가족들의 평안을 빌며 쌓아 올린 크고 작은 돌탑 3,000여 개로 된 조붓한 길이다.
돌탑을 쌓고, 서툰 글씨로 자식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쓰면서 올린 어머니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할머니가 기거했다는 움막 앞에 서면 누구나 다 가슴 뭉클한 모정을 느끼게 된다.
온몸으로 겨울을 견디어낸 나무들이 늦된 봄을 틔워 올리는 곳, 모정탑길을 찾아 지금 우리 모두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의 조속한 종식을 기원해 보면 어떨까. 춘래춘 불사춘(春來春 不似春), 봄 같지 않은 봄, 우리의 봄은 아직 멀지만 ‘모든 중생이여, 항상 행복하여라. 태평하고 안락하여라(숫타니파타)’ 이 말씀에 기대어 더 간절하게 마음의 봄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