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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 다시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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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1-28 14:35 조회5,7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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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주

 

엄마, 이리 와서 앉아 봐! 꽃이 예쁘네! 엄마보다는 영 못하지만.” “늙은이가 이쁘면 얼마나 이쁘겄어? 이쁘기야 세상에 니가 제일이지!”

 

탁구공을 주고받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찬사에 얼마나 예쁘기에,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봤다. 별로 예쁘지 않은 중년의 여인이, 전혀 예쁘지 않은 노년의 여인에게 꽃나무 옆을 가리키며 활짝 웃고 있다. 늙은 어머니가 구부정한 몸을 움직여 느릿느릿 꽃그늘 아래에 이르기까지, 얼룩덜룩 화장이 밀린 딸의 웃음 가득한 눈이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따라 걷는다.

엄마가 옆에 서니까 세상 모든 꽃이 다 시들시들해진다는 딸의 너스레에 분홍색, 빨간색, 보라색, 만개한 부겐빌레아를 배경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 선 어머니의 어깨가 당당해진다. 이렇게 저렇게 몸을 움직이고 각도를 달리해 가며 딸은 부지런히 어머니의 웃음을 담는다. 예쁘지 않아도 예쁜 모습으로 모녀는 행복을 찍고 있다.

 

모녀가 온실 가득 꽃향기 같은 웃음을 흩뿌려놓고 가버린 후, 오래도록 부겐빌레아 꽃 넝쿨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그 밑에 서 본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려는 뜨거운 울음. 이럴 줄 알았다. 처음 그 모녀와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나는 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내게도 그리운 이름, 어머니가 있었으므로. 살아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지가 이곳 제주였으므로.

 

어머니는 뇌출혈로 인한 혈관성 치매로 4년이 넘도록 다른 세상을 사셔야 했다. 장마철에 반짝 해가 들듯 잠깐씩이나마 맑은 정신이 돌아오곤 하던 그때, 연민과 슬픔과 후회 가득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소원을 물었었다. 없다. 어머니의 답은 간단명료하고 단호했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 무게를 줄여주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었을 터.

그런 어머니를 달래고, 졸라서 얻은 답이 해외여행이었다. 그제야 돌아보니 어머니는 그 흔한 해외여행이라는 걸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던 젊은 시절에는 해외여행의 문턱이 높기도 했지만,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후에도 어머니는 넷이나 되는 자식 뒷바라지에 애면글면해야 했다. 노후를 준비할 겨를이 있었을 리 없다. 오랜 투병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쓰러지셨다.

 

젊어서는 부당하고 억울한 시집살이에 눈물바람을 하시더니, 자식들 다 짝지어 독립시킨 후에도 어머니는 가끔, 날개 펴고 훨훨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셨다. 그럴 때는 뻔하다. 근근이 꾸려가는 살림살이가 버겁거나, 자식들 일로 속이 시끄럽거나, 아버지 수발에 고단할 때, 왜 그것들로부터 놓여나고 싶지 않았겠는가.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떠난 해외여행海外旅行이 제주도였다. 가까운 동남아라도 다녀올 참이었는데 비행시간이 길어지면 뇌혈관에 이상이 올 수도 있다는 주치의의 만류에 어쩔 도리 없이 그만, 말 그대로 바다를 건너는 해외여행으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제주에 머무는 사흘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희미하다. 아니,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를 여행한 사실마저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조금 전, 꽃보다 더 예쁜 어머니라는 찬사를 연발하던 딸과, 딸의 칭송에 의기양양해 하던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제주도에 머무는 내내 십여 년 전의 일을 영영 떠올리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결이 그리 곱지 못한 탓일 게다. 무슨 꽃이 저렇게 많이 피었다니? 진달래구나, 진달래야.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기억이 뭉텅뭉텅 잘려나간 어머니에게는 진달래였던 억새가 산야에 지천이다.

 

그만 따자. 남의 밭에서 귤을 따면 안 되지. 농사짓기가 얼마나 힘든데. 귤 따기 체험 농장이라 괜찮다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가위를 집어던지고 탈출(?)을 감행하시더니, 제주도 돼지는 똥돼지라 더러워서 안 먹겠다며 입을 딱 붙이고 도리질치는 바람에 내 속이 상하기도 했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를 하늘처럼, 큰 스승 섬기듯 공경하고 예배하라.’라는 <잡보장경>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후회 아닌 일이 없다. 자식은 그런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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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일정의 이번 여행은 혼자다. 혼자니까 홀가분하고 좋은 것도 많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다. 당초 동행을 하기로 했던 친구가 내 마음 반, 제 마음 반, 계획을 접었기 때문이다.

나는 괘씸한 마음에, 어림짐작이지만 그녀는 서운한 마음에 둘 다 침묵시위 중이다. 내가 그렇듯 그녀도 편치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가 벗어진다고 했던가. 무료로 쓸 수 있는 숙소와 차량이 있다던 그녀의 말이 공수표가 되었다. 작년에도 같은 일로 기운을 빼더니 올 해도 출발을 보름쯤 남겨놓고 차량이 안 되겠다, 1주일 전에야 숙소를 쓸 수 없게 됐다는 통보다. 거기다가 본인도 여행을 접겠다며, 불유쾌한 기분 떨쳐내고 즐겁게 잘 다녀오라는 오지랖까지.

 

1주일을 앞두고 숙소를 잡는 일부터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입맛에 맞는 곳이면 비싸고, 가격이 어지간하면 날짜가 맞지 않았다. 여행의 설렘 같은 건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채 쫓기듯 떠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다행히 여행은 즐겁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속을 끓이고 있었을 것 같다.

 

작년에 너랑 함께 왔던 곳이야, 하면서 사진 몇 장만 보내도 그녀 역시 아무 일 없었던 듯 화답할 게 분명하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가 않다. 내가 휴대전화 문자 창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것도 그런 일을 피하고 싶어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또다시, 억지로 이해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하는 것도 위선이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그렇게 되풀이해 온 내 위선에 내가 맞으니 더 아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빚어지는 문제 중에는 말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입장이 다르다 보니 오해의 불씨가 되기도 하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책임한 말 때문에 큰 상처를 입거나 거짓말로 인해 막중한 피해를 보는 사람도 생긴다.

 

오죽하면 <숫타니파타>경에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라는 말씀이 전해지고 있겠는가.

 

나도, 그 친구도 모두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이런 이야기가 누워서 침 뱉는 격이며, 나의 옹졸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움이라는 것도 안다. 섣부른 이해가 모래를 삶아 밥을 짓겠다는 오만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제주의 바람 속을 걸으며 그 답을 묻고 또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