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용서, 그 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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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9 12:22 조회5,35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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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그 먼 길
잘나가는 게 재수 없다, 여자가 50년 지기 A로부터 팽 당한 이유라고 했다. 자신에게 특별히 잘못한 일은 없지만, 여자가 유복한 집안에서 고명딸로 사랑받고 자란 것이, 공부도 잘했고 재주도 많아서 늘 눈에 띄는 존재였다는 사실이, 대부분 명예퇴직이다 정년퇴직이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당당하게 일하면서 인정받고 대우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게 영 눈꼴이 시고 배가 아프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지 않다는데…, 친구가 잘 사는 게 싫다는데…. 친구가 잘 되는 게 싫다면, 그럼 친구 아니지. 내가 무능력한 부모님 밑에서 춥고 배고프게 자랐더라면, 내가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았더라면, 지금 내가 생계를 걱정하면서 병들어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다면…. 아마 A는 또 구질구질해서 재수 없다, 이렇게 말했을 거야.
이렇다 할 말다툼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등을 돌리고 소식을 끊어버린 A의 속마음을 이제야 전해 듣게 됐다며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 여자에게 나는 이해니 용서니 하는 우아한 충고 대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해 주었다. 화해를 하든지 절교를 하든지 마음이 편안한 쪽이 정답이라고. 그리고, 그 답을 얻는 데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라고. 때로 진실은 아프기도 한 법, 그 아픔을 끌어안는 것도 진실이라고 말이다. 이해나 용서가 정답이고 정도正道라고 칭송받아왔다 하여 굳이, 꼭 그걸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섣부른 이해나 용서는 곪아 들어가는 상처 같아서 결국 자신을 다치게 할 뿐이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제가 어떻게 용서를 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영화 <밀양>의 여주인공의 절규다. 어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를 찾았으나, 이미 하나님을 만나 잘못을 용서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노라며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고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기원하는 범인의 말에 그녀는 또다시 극도의 배신감과 절망감에 빠지고 만다.
특정 종교를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먼저 밝혀야겠다. 이건 단순히 용서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므로 침소봉대는 절대 사절이라는 말씀도 드리고 싶다.
영화 속 범인은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 여주인공, 즉 인간으로부터는 용서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에 대한 배려나, 피해자를 향한 절절한 회개 없이, 다만 신을 통해 받았다는 용서가 과연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을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어진 그런 거래(!)에 흔쾌히 동조하고, 참척의 고통마저도 없던 일인 양 훌훌 털어버려야 할까?
50년 지기, 그 오랜 인연도 자신의 인내심이 만들어낸 사상누각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며 여자가 쓴웃음을 짓는다. 나는 안다. 여자의 배려나 양보를 당연 이하로 여기던 A의 무례함을. 안하무인에 이기적이고 강퍅한 A에게 종종 일방적인 펀치를 얻어맞으면서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A의 곁을 지키던 여자의 고운 심성을. 최선을 다했기 때문일까. 믿었던 친구에게 발등을 찍히고도 여자는 담담하다 못해 냉담하기까지 하다.
본의 아니게 용서를 강요당할 때가 있다. 통 큰 용서를 하는 사람에게는 감동 어린 박수가 쏟아지지만, 용서를 거부한 사람에게는 속이 좁다는 둥, 인정이 없다는 둥 비난이 빗발친다. 잘못된 우정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여자나, 용서 운운하는 범인에게 분노하는 <밀양>의 여주인공을 향한 세상의 눈이 곱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 이상은 그들의 몫이다.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용서.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또 한 번 온 마음으로 견디고 이겨내야 할 더 깊은 상처이기 때문이다.
원망의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분노나 미움을 완전하게 없애지 못했다면 그건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진실로 용서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 것, 그것 역시 진실이다.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용서는 무의미하다. 진정한 반성과 사과는커녕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라면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다.
잘못을 뉘우친다는 것과 용서를 받는다는 것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뉘우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거나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용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진정한 뉘우침이 전제돼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피해자의 넓고 따뜻한 마음이 따라야 한다.
피해자가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 차마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는 마음, 그게 용서고 그게 참회의 자세다.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그 마음에 몰아치는 광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진심으로 참회하며 기다리는 일, 설령 용서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없이, 끊임없이 읍소하는 일, 그게 죄인의 도리이자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용서라는 것이 하는 사람이나 구하는 사람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니라 그런지 그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 참 많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대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고 용서하라. 그때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미국의 교육 상담학 박사 웨인 다이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했다.
‘원한을 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던지려고 뜨거운 석탄 덩어리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다. 화상을 입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많은 불행은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한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마음의 상처는 더 깊어진다. 용서하면 아픔과 괴로움이 줄어든다. 진정한 치유는 용서를 통해 이루어진다.’라는 가르침도 용서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다.
하지만 일개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는 내게는 아득한 이야기다. 나 같은 사람은 이 생이 끝날 때까지도,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용서하라는 경지에는 영영 이르지 못할 확률이 높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갑자기, 문득문득 상처가 되살아나고, 잘못한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던가. 하물며, 미처 용서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에 떠밀려서, 혹은 아름다운 명분을 찾느라 용서 아닌 용서를 했다면….
그것 또한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를 끌어안고도 웃어야 하는 일. 부처님의 가피가 필요한 세상이다. 용서를 구해야 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