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아름다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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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3 14:06 조회5,60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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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
A의 손을 보는 순간 내가 잠시 허둥거렸던 모양이다. 한 마디 반쯤 뭉텅 잘린 오른쪽 가운뎃손가락과 한 마디쯤 잘려 나간 네 번째 손가락, 손톱 부분이 으깨진 새끼손가락까지, 이미 그 손을 보았으면서도 본 척을 해야 하나, 아니면 못 본 척을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쫙 펼쳐 보이면서 아, 이거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크게 다쳤어요, 하면서 웃어 보인다. 사춘기 때라 불구가 된 것보다도 남들과 다르게 됐다는 게 더 견딜 수 없어서 학교도 그만두고 스스로 만든 철책 속에 자신을 가두어 버렸단다. 자살 시도도 여러 번, 급기야 그녀의 깊은 절망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어머니가 죽는 것 외에 답이 없다면 그 먼 길을 너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함께 가자면서 그녀의 상처 입은 손을 꼭 잡아 어루만지며 내 손가락을 잘라서 널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하시더란다.
“그 순간 내 모습이 보이는 거 있지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인생을 유기하고 있는 초라하고 비겁한 모습이었어요. 손가락이 뭐 어때서, 하고 생각하니까 그다음부터는 차츰 익숙해지기도 했고, 손가락이 조금 짧은 만큼 더 많이 노력하면 되지, 하니까 또 그렇게 되기도 했고. 뭐든 열심히 했어요. 그 알량한 방황을 하느라 공부할 때를 놓친 죄로 평생을 옷 만들고 옷 고치느라 이 손이 고생 많이 했어요. 이래 봬도 이 손이 일류 기술자거든요. 이거 봐요, 이 옷도 내가 만든 거예요. 예쁘지요?”
그러고 보니 작은 꽃무늬가 점점이 박힌 그녀의 원피스가 참 편안해 보인다. 원피스를 만들었을 그녀의 손을 마음 놓고 바라본다. 세상의 편견보다 몇 배 더 질기고 무서운 아집을 이겨낸 아름다운 손, 밝고 건강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장한 손이다.
그녀는 매사에 참 솔직 담백하다. 놀며 쉬며 반 백수로 사는 남편도, 열다섯 평짜리 연립주택에서 네 식구가 복닥거리는 넉넉지 못한 삶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부족한 것, 못난 것도 다 자신의 성치 않은 손가락과 같은 것이려니,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든, 이해 못 할 일도 없더라는 것이다. 장애인 복지 카드가 있어서 영화나 공연을 반값에 볼 수 있고, 웬만한 곳의 입장료는 면제까지 받을 수 있으니 그 또한 복이라며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람을 만드는 것이 마음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녀와 비슷한 처지인 B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도 어려서 오른손을 다쳤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그 상처를 무기처럼 휘두르면서 산다. 늘 오른손을 감췄고, 비싼 것들로 자신을 포장했다. 무엇이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은 용납하지 않았다. 제까짓 게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는데,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한데…, 하면서 시비를 걸었고 불화를 만들었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그의 일상이 행복할 리 없다. 잘못도 없이 된서리를 맞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듭되는 횡포에 많은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같은 상처를 지녔으되, 삶의 질이나 살아가는 모양새가 참으로 다르다. 상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심기일전心機一轉, 전화위복轉禍爲福 A의 품은 넉넉해졌고, 그 상처를 끝내 부정함으로써 오만불손傲慢不遜, 방약무인傍若無人, B의 인생은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우리 동네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를 찾았다. 보현사에 가면 늘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떠올리게 된다. 보현사라는 이름이 『화엄경華嚴經』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의 보현보살에서 유래한 것 같아서다. 감정이나 본능에 치우치지 않는 슬기로운 마음과 깨달음의 덕을 갖추고 있는 보현보살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실제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하고 필요한지, 행行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보살이다.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왼편에서 부처님의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보여주는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하는 데 비해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이덕理德과 정덕定德과 행덕行德을 보여주는 실천의 행을 상징한다. 중생들의 목숨을 늘려주는 덕을 갖고 있어서 보현연명보살 또는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불리는 보현보살은 사람의 귀천貴賤이 혈통이나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사람의 행行, 즉 일상생활이 진리에 맞는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모든 생명에게 이익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지에 따라 귀하고 천한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고즈넉한 보현사 뜰을 거닐면서도 보현보살의 가르침은 그저 잠깐으로 접어둔 채, 오래도록 A와 B에 대해 이러고저러고 곰곰이 생각하는 걸 보면 나도 별수 없는 속인俗人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누군가를 저울질하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이 있어서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 같다.
사람 사이에 꼭 필요한 게 이해와 공감이 아닐까. 믿음은 98%의 이해와 공감, 그리고 2%의 용기로 생겨난다는 말이 있다.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든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신뢰가 생기고, 모든 관계가 원만해진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내가 누군가의 뜻에 공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길 것이며, 얼마나 잘 지낼 수 있겠는가. 이른바, 소통의 부재. 더불어 행복할 수 없는 까닭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께서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설하셨다. 우주에 존재하는 유ㆍ무형의 모든 사물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며 마음에 있다는 말씀이다. 내면적인 조건인 나의 감정 상태가 바깥 조건인 외적인 것보다 더 크게 작용해서 과잉되거나 과장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를 경계해서 바깥 조건보다 내면의 변화를 왜곡 없이 바라보고 깊이 성찰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끔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독불장군의 외로운 길을 걷고 있다는 B의 이야기를 전해 듣곤 한다. 나 역시도 그의 독선에 상처받기를 여러 차례, 다른 사람이 그랬듯이 나 또한 그와의 인연을 탈탈 털어버린 터라 오십 보 백 보,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부류임을 고백해야겠다. 일체유심조,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으로 보여 주는 보현보살의 눈에 비친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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