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 혜학이란 무엇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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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1-27 13:20 조회4,48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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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학이란 무엇인가?(2)
분별지와 무분별지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밝혀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을 근본에서부터 제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른 종교는 신행생활에서 믿음을 가장 강조합니다. 자기들의 교전이나 창시자의 말을 무조건 믿는 것으로부터 그 종교의 신자로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항상 지혜로서 인과관계를 잘 살펴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합니다. 우리가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창조주라는 허구의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창시자를 떠받들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지혜로서 괴로움의 싹을 자르고자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기로서 얽혀있는 이 세상은 나 혼자만 행복해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서 다 같이 행복해야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을 믿으면 복을 받고 다른 신을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종교에 반하여 불교는 항상 지혜를 강조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데에도 지혜가 없이 베풀면 도리어 베푸는 상대를 망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항상 지혜와 자비를 새의 양 날개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불제자가 되어 행하는 모든 신행활동은 궁극적으로는 걸림 없는 지혜를 얻어서 괴로움을 없애고 나아가서는 다른 이들의 괴로움도 덜어주기 위한 방편입니다. 불교도는 항상 이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지혜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하고 구분을 합니다. 지혜에는 유루지와 무루지가 있다면 지혜가 작용하는 방법에 따라 유분별지(有分別智)와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나누기도 합니다. 유분별지라는 것은 지금 나타난 어떤 현상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즉, 파악하는 쪽인 지혜와 파악이 되는 쪽인 대상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의식되는 것으로 분별이 작용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라는 이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난 현상에 대하여 나의 관점에서 그것을 파악하는 그러한 지혜를 말합니다. 여기에 반하여 무분별지는 진리와 지혜가 일체화된 지혜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파악하는 쪽인 지혜와 파악되는 쪽인 진리가 일치하여 구분이 없는 지혜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지혜와 진리가 하나가 되어 구분이 없는 상태로서, 지혜가 곧 진리이고, 진리가 곧 지혜인 그런 상태의 지혜를 무분별지라고 합니다. 진리와 일치한다는 것은 진리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지혜는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무분별지라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이것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일체화한 이 무분별지가 비로소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 일반에서는 이 분별에 대해서 견해가 다릅니다. ‘그 사람 참 분별 있는 사람이네.’라든지 ‘그 사람 참 무분별하게 설쳐대네.’ 하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래서 분별이 있는 사람은 생각이 깊고 지혜로운 사람이고, 무분별한 사람은 앞뒤도 못 가리는 무식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분별과 무분별은 사회 일반의 인식과 매우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분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자기의 마음, 혹은 지혜가 그 인식대상이 되는 것을 구분하고 구별하여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즉,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신체로 느끼는 것, 혹은 마음에 떠오르거나 생각하는 것 등에 대해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식되는 차이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개념화하는 것이 모두 분별입니다.
이러한 분별이 일어나게 되면 우선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이 생기게 됩니다. 즉, 자기라는 인식주체가 있어 대상을 보고 저것은 빨간 것이다, 저것은 좋은 냄새다 하고 구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렇게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으로 분별이 되면 거기에서 좋다거나 싫다고 하는 호오(好惡)의 감정이 생겨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옳다, 그르다, 혹은 맞다, 틀리다라고 하는 판단도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에 대하여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우리의 마음은 집착을 하게 됩니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판단 그 자체가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집착이 생기면 거기에 따라 번뇌가 생깁니다. 즉 좋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누리고 싶어 합니다. 즉, 욕탐이라는 번뇌가 생깁니다. 싫은 것에 대해서는 멀리하려고 하며, 그에 따라 진심이라는 번뇌가 생깁니다. 혹은 좋은 것을 가지지 못했을 때에도 진심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 번뇌가 일어나면, 그에 따라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혹→업→고’의 구조에서 본 것처럼, 번뇌에 의하여 악업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별이 일어나는 순간, 인식주체로서의 나와 인식대상으로서의 타자의 관계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여러 가지 번뇌가 생기고 마침내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