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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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12-02 12:54 조회4,43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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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나와 인연이 있든 없든 유난히 많은 죽음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충격적이었던 것이 하루 이틀 사이에 연이어 받게 된 A 여사와 B 선생의 부고訃告였고, C 선생의 예비 된 죽음도 놀라웠다.
건강 염려증으로 노심초사하며 1주일에 두세 번씩 병원 순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A 여사는 돌아가신 지 사나흘이 지나서야 딸에게 발견되었고, 법정 스님처럼 암과 친병親病 중이며 천상병 시인처럼 귀천歸天을 꿈꾼다던 낙천주의자 B 선생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로, 매달 받아들이는 월세만 해도 기백만 원이 넘는다는 A 여사는 탄탄한 재력가임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에게조차 매우 인색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유일한 바깥나들이인 병원에 갈 때도 거동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매번 딸이나 세입자를 불러 차를 얻어 타고도 입을 쓱 닦았고, 밤에도 TV 불빛이면 족하다면서 형광등 하나 켜는 법이 없었으며, 물에다가 밥 말아 김치 한 쪽 얹어먹는 게 일상이었단다.
돌아가신 분을 두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A 여사는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이라고 내밀기로도 유명했다. 게을러서 가난한 거라며, 굶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의 것을 덜어주지 않았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으니 남을 도울 일도 없다는 것이 A 여사의 지론이었으나, 돈이든 물건이든 손에 들어가면 나오는 법이 없어서 개미지옥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삼우제를 지내고 딸 넷이 모여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더란다. 구석구석 차고 넘치는 유행 지난 옷가지며 골동품 같은 살림살이, 썩거나 말라비틀어진 건강식품,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족히 한 트럭은 되었다던가. 5억 원이 넘게 들어있는 통장과 함께 월세의 전액에 가까운 돈을 꼬박꼬박 넣고 있는 적금통장도 나왔다고 한다. 자식들이야 쾌재를 부를 일이겠지만, 각질이 허옇게 일어난 얼굴에 소맷부리가 나달나달하게 해진 옷을 입고 다니던 A 여사를 생각하면 그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곤 한다.
B 선생은 마음이 부자였다. 4~5년 전 식도암으로 큰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감사를 배우고,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던 B 선생. 사람들은 B 선생의 소박하고 겸손한 인품을 참 좋아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중앙부처의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하대를 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을 지는 해라고 말하면서도 미미한 온기나마 고향 발전을 위해 쓰고 싶다며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 지혜와 지식을 보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코로나19의 여파라고는 하지만 썰렁하기 짝이 없던 A 여사의 장례식장과 달리 B 선생의 빈소에는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연금의 3분의 1을 장학단체에 기부해 왔다는 이야기도, 홀로 사는 이웃 노인들을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부모 돌보듯 알뜰하게 챙겨 왔다는 이야기도, 농촌 일손 돕기나 집수리, 무연고 사망자 장례지원 등의 자원봉사를 틈틈이 해왔다는 이야기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왔다. B 선생은 평소에 서약한 대로 안구와 시신을 기증하고 우리 곁을 떠났지만 선생이 남긴 따뜻한 인간애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다.
B 선생의 갑작스러운 부고 못지않게 놀라웠던 게 가을볕이 따사로운 어느 날 한적한 농가식당에서 열린 C 선생의 가든파티였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조촐한 음식을 나누면서, 수년간 갈고닦은 색소폰 실력을 선보이고 싶어서 만든 자리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하지만 멋진 색소폰 음률 속에 모두가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었던 그 자리는 단순한 가든파티가 아니라 C 선생이 직접 진행하는 C 선생 본인의 예비 장례식 자리였다.
뉘엿뉘엿 땅거미가 질 무렵, 감청색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양복과 자주색 나비 보타이로 한껏 멋을 낸 C 선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함께해 줘서 고맙다, 그동안 함께한 시간들이 즐거웠다, 함께했던 추억을 간직하고 떠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것이 내 장례식이다, 부디 건강하시라…. 고별인사였다. 자식들에게 부고를 내지도 말고, 혹시나 알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조위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해 두었다고 했다.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어 말 한마디, 술 한 잔 나눌 수 없는 장례식보다는 이렇게 살아있는 날, 따뜻한 손 마주 잡고 눈 맞추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마련했다는 C 선생의 예비 장례식은 선생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연주로 막을 내렸다. 항암치료 중인 C 선생의 소회를 대변하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색소폰 소리에 더러는 눈물을 훔치고, 더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죽음이 삶과 맞닿아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태어났으면 누구나, 반드시,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의 모양새도 천차만별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마음가짐도 가지가지이다.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대신해 줄 수도, 미룰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 죽음인 바, 태어날 때를 대비해 배냇저고리를 준비하듯이 생의 마지막 날을 대비해 떠날 준비를 해둬야 한다.
A 여사와 B, C 선생을 보면서 잘 사는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아름답게 죽는 웰 다잉(well-dying)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라 하더라도 미리 준비된 죽음을 통해 좋은 죽음을 보여주고, 후회 없는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잘 죽기 위해서도 연습과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혹시 모를 일, 지난날을 돌아보노라면 편협하거나 강퍅했던 내 발자국이 보일는지도.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이 엷어지고 새 살이 돋듯 그 자리에 겸허한 순응이 생겨날는지도.
‘어리석은 자는 평생 현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도 진리는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법구경』의 말씀이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삶이 존엄하다면 죽음도 존엄해야 한다. 그걸 만드는 게 바로 자기 자신이지만 어쩔 것인가.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그걸 깨우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지난해 모 일간지에 실렸던 이어령 선생의 인터뷰 내용 몇 구절 속에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오늘을 충실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답이 들어있는 듯하다.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삶은 더 농밀해진다.
저 꽃을 또 볼 수 있을까.
그럴 때 비로소 꽃이 보이고,
금방 녹아 없어질 눈들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암에 걸리고 나니 오늘 하루가 전부 꽃 예쁜 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