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위드다르마 연재글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향유 | 재가불교의 나아갈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9 12:11 조회4,729회

본문

재가불교의 나아갈 길

 

 

출가자의 권위를 강조하고 재가자를 배척함으로서 불교의 위상이 찾아질 수 없으며, 자격을 갖춘 재가자의 지위와 역할이 보장됨으로서 불교의 위상과 재가자의 위상도 찾아질 수 있다.

그러므로 출가자와 재가자는 상호 구도자(求道者)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대승불교 지도자들이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정통의 지위를 찾게 되었듯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출가와 재가의 엄연한 차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불교를 이끌어갈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며, 사부대중 화합의 길을 찾아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의 하나인 유마경은 재가보살의 대도(大道)를 밝혀주는 요체로 평가받고 있다. 문자 그대로 세속(世俗)의 거사인 유마거사는 부처님 법의 묘의(妙意)에 통달해서 삼계(三界)의 집착을 떠났고, 처자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재가보살의 전형이었다. 가난한 이에게는 아낌없이 베풀었고, 이교도를 보면 바른 도를 가르쳤으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술집과 놀음판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바른 자세와 정기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 제자들의 잘못된 수행과 처신을 가차 없이 질책했으며,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는 유명한 법문을 통해 중생과 더불어 사는 재가보살의 수행과 책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각각의 중생들이 처한 맥락에 맞는 즉, 근기에 맞는 법문이었듯이 지금 불교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과연 근기에 맞는 메시지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삶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 부처님 당시의 삶의 모습이 물론 오늘날처럼 복잡하지는 않았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사회 문화적인 구조에서 오는 고통까지 모두 파악하셨기에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이는 해탈의 인연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의 불교는 공업중생인 동시대 중생들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앞과 뒤의 시간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함께 굴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동시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의 불교가 상구보리만을 추구한다면 마땅히 경계하고 걱정해야 되는 것이다. 하화중생하기 위해서는 중생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뒤에 감춰진 구조적 진실까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실로 근기에 맞는 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 공업중생의 삶을 보아야 할 것이다. 단지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해서 온전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생구제의 보살행은 대승의 오랜 전통이다. 사회화 되고 보편화 된 불교 이념을 바탕으로 중생의 현실적인 고를 해결하고, 사회를 맑고 향기롭게 하는 것이 재가불교의 개념이라 하겠으며, 아는 만큼 실천하고 베풀어야 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불교적 표현인 것이다.

 

깨달았다는, 또 공부했다는, 본성을 찾았다는 사람이 남을 힘들게 하고 세상을 탁하게 한다면 그 깨달음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 21C 재가불교가 나아갈 길이 바로 이러한 것이고 지향해야 하는 점이며, 생활과 불교가 나눠지지 않는 전법도량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불교는 사회의 문제를 통찰하고 불교적 해법을 제시할 내부능력이 빈약하다. 교단의 주류는 돈, 권력, 조직과 같은 세간적 운영기제가 지배적이다. 이런 현실을 헤쳐갈 해법은 통찰과 실천인 것이다.

재가불교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은인자적하지 말고 중생의 삶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알아야 한다.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쵸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민이다.” 지금 세상은 종교라고 하는 전통의 틀보다 연민, 자비와 같은 인간을 돌보는 가치가 더 중요한 시기일 수 있다.

 

오늘의 한국불교가 연민보다 못한 종교는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종교보다, 교단보다, 내가 승려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생에 대한 연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