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야기 | 나는 그저 나일뿐 - 테이블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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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3-30 11:46 조회4,43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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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나일뿐
테이블야자 – Parlor palm
19세기 런던 가정집에서 꽃구경하기
지금부터 저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해 보실까요?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170년 전, 타임머신이 도착한 곳은 영국 런던의 어느 평범한 가정집입니다. 언뜻 봐서는 요즘 가정집과 별로 달라 보이는 게 없습니다.
“제가 사는 21세기랑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마침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요? 실은 우리도 이렇게 환하고 따뜻한 집에서 살게 된 게 얼마 안 됐어요. 10년 전만 해도 아주 어둡고 추웠답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지요. 창문도 지금은 이렇게 큼지막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리가 비싸고 질도 안 좋아서 이렇게 큰 유리창은 엄두도 못 냈어요.”
“아, 그럼 지금처럼 집 안에서 식물을 키운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겠네요? 어둡고 추운 실내에서는 식물을 키우기 힘들 테니까요.”
주인 아주머니가 타 준 허브차가 긴장해 있던 제 몸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렇죠. 그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깜깜한 집에서 어떻게 식물을 키우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집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이 많아져 아주 행복하답니다. 창가를 보세요. 하얀색 제스민 꽃이 참 예쁘죠? 그 옆에 있는 보라색 꽃은 헬리오트로프랍니다. 둘 다 향기가 아주 좋아요. 그리고 이쪽을 보세요. 좀 어두운 곳에서도 잘 자라는 애들이 있어요. 얘는 네프롤레피스, 얘는 아디안툼, 그리고 얘는….”
저는 주인 아주머니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건 야자 아닌가요? 19세기 런던의 가정집에서 야자를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야자가 이런 곳에서도 잘 자라나요?”
너 혼자 야자? 우리도 야자!
누구나 ‘야자나무’라는 단어를 들으면 바닷가를 먼저 떠올립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바닷가에 길쭉길쭉 위로 솟아있는 야자나무, 그리고 꼭대기에 달려 있는 열매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야자나무’는 실은 야자나무 가운데 한 종류인 코코야자(Cocos nucifera)입니다.
전 세계 열대. 아열대 지역에 퍼져서 자라며, 실제로 야자과식물 중 가장 유명한 나무지요. 우리가 코코넛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코코야자의 열매입니다. 하지만 야자과에는 결코 코코야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코코야자를 포함해 무려 220속 2,500종이 넘는 야자가 이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식물이 거의 못 자라는 아프리카 북부나 서남아시아 사막의 오아시스가 고향인 대추야자도 있고, 중국 남부가 고향이며 생김새가 대나무를 닮은 관음죽, 종려국도 있습니다. 모두 고향이나 생김새는 다르지만 야자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직사광선은 너무 부담스러워
크기나 모양은 다른 야자들과 좀 다르지만, 테이블야자 또한 야자과의 한 식물입니다. 분류상으로는 카마이도레아(Chamaedorea)속에 속하며, 테이블야자라는 이름은 테이블 위에서 키울 정도로 작은 몸집 때문에 얻게 되었습니다.
테이블야자는 다른 야자들과는 달리 멕시코와 과테말라에 있는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고향입니다. 이렇게 높은 산의 숲속에서 살며 낮은 온도에 적응하고, 그늘지고 습한 환경을 좋아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집 안에서도 테이블야자가 튼튼하게 잘 살려면 밝은 그늘이면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놓아 주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환경만 제대로 만들어 준다면 테이블야자는 높은 산에서 연마한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우리 집 테이블을 푸르고 싱싱하게 만들어 줍니다. 높은 산의 서늘한 기운을 한여름 우리 집의 테이블에도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단 테이블야자를 키울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직사광선입니다. 고향에서도 직접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자라지 않은 탓에 환경이 바뀐 지금도 여전히 직사광선만큼은 부담스러워합니다. 계속해서 직사광선을 쬐다가는 잎이 타버릴 수도 있으므로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한 존재의 다양성과 특수성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부터 21세기인 지금까지 야자나무는 여전히 우리들의 집 안 한 구석을 지켜 오고 있습니다. 또한 아시아 대륙의 중국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멕시코까지 지구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야자나무에 대해 ‘바닷가에서 유유자적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나무’라는 이미지만을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야자나무는 너무나 억울했을지도 모릅니다. 시공을 초월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사람들이 몰라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억울한 게 어디 야자나무뿐일까요? 실은 얽히고설킨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존재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인정하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 편을 가르고 선을 긋습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어떻게 편이 갈리고 선이 그어지느냐에 따라 때로는 나답지 않은 ‘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싫어하는 ‘나’가 되기도 합니다. 한 존재에게서 그 원형과 진심을 읽어 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보고 있자니 문득 테이블 위 야자나무에게 위로라도 한마디 듣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