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 근묵자흑과 처염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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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3-30 11:45 조회4,227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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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묵자흑과 처염상정
“보살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초심(初心)을 잃지 않는다.”
“유연하고 탄력성 있는 수행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바라지만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이런저런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인생을 불교에서는 고해(苦海)에 비유하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娑婆世界), 감인토(堪忍土)라 하기도 한다. 고난으로 가득한 고해는 어서 벗어나야 할 곳이며, 사바는 있는 동안 다가오는 갖가지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하는 곳이 된다.
고통의 원인은 본인의 잘못도 있을 수 있고 세상의 잘못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고통을 원치 않지만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든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병에 걸려 아프길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우리의 몸은 근원적으로 생로병사의 한 가운데 있으므로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든 찾아오기 마련이다. 물이 차면 넘치듯 공덕이 쌓이면 복을 받게 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그래서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기 전까지는 잘못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잘한 사람도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일일 뿐이다. 인과법은 역연하여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선행을 한 집에 좋은 일이 생기고 ‘선인낙과(善因樂果)’라 착한 일을 하면 즐거움을 얻는다
문제는 행복에 이르는 조건이나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으려 하는 경향이다. 보통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 익숙해 있다. 행복의 조건을 부나 명예 등 외부조건에서만 찾으려 하고 내면의 덕성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또한 고통의 원인을 외부 환경 혹은 남 탓으로만 돌리려 하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상황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황은 각 개인과 전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매우 중요하다.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는 말처럼 좋지 못한 일을 일삼는 이와 친근하면 자기도 모르게 좋지 못한 쪽으로 물들기 쉽다. 반대로 좋은 인연과 함께하면 좋은 결과가 생기기 쉽고 좋은 조건에 놓이면 성과도 더 좋을 수 있다. 맹모삼천지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이 있다. 세간에 살면서도 속세에 물들지 않는 보살의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러운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이 늘 아름답고 깨끗한 꽃을 피우듯이 연꽃은 보살의 상징이다.
처염상정도 꼭 주위와 무관하게 나 홀로 깨끗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는 연기법을 상기한다면 그런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외부 상황 탓을 하기보다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해도 초심(初心)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으면 외부 조건보다 내면의 태도를 강조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상황이 좋든 좋지 않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부단히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수행자의 삶을 보여준다.
이러한 보살의 삶은 자신을 돌아보아 반성하고 능력을 배가하는 노력으로 수놓아진다. 그래서 상황에 온전히 뛰어들어 함께 하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 내면에 지혜와 자비의 힘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자취 없는 보살행의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유연하고 탄력성 있는 수행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님 가르침은 ‘나 홀로’를 지향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좋은 도반을 찾도록 노력하되 찾지 못하면 좋지 못한 무리와 어울리기보다 차라리 홀로 가라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좋은 도반도 찾고 스스로 좋은 도반도 되어 서로서로 선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