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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 혜학이란 무엇인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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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3-01 15:03 조회4,3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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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학이란 무엇인가?(3)

 

분별지의 한계

불교의 지혜에는 분별지와 무분별지가 있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무분별지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하여 분별지라는 것은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을 분별하여 보는 지혜입니다. 자기와 대상을 분별하게 되면, 항상 자기는 소중한 것이며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고, 또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어떠한 행위를 하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향이 더욱 강렬해지면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윤리라든가 도덕이라는 것을 볼보지 않게 됩니다. 자기의 이익이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여 가지려는 것인데, 모든 행위를 여기에 맞추다 보면 윤리나 도덕이 무시되고 오직 이기적인 투쟁만이 있게 됩니다. 자기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고 다른 사람들과 다투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이외의 타자도 자기와 똑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것이 서로 부딪히다보면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살벌해지고 각박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분별에 의해서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분별심을 사려 깊고 지혜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불교에서 분별이라는 것을 괴로움의 근원으로서 경계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분별심을 불교에서는 허망분별(虛妄分別) 혹은 망분별(妄分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괴로움을 일으키게 되는 분별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분별이 없는 상태는 마치 맑은 거울에 온갖 사물이 비추어서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들어도 우리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분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듣는 것에 구분을 짓습니다. , 보고 듣는 나와 보고 들리는 대상을 구분하여 거기에 나라는 주관적인 것을 척도로 하여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저것은 나쁜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저것은 추한 것이다고 하면서 분별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정한 가치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 대상과 나 사이에 구분을 지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달은 달로서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인데 자기의 마음이 슬플 때는 그 달이 슬퍼 보입니다. 혹은 반대로 자기가 기분이 흥겨울 때는 그 달을 보면 왠지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누군가와 그 달빛 아래에서 데이트라도 하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같은 사물이라도 자기의 마음에 따라 분별이 일어나고 거기에 따라 좋고 싫어하는 감정이 나타나며 또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를 분별하여 구분하는 데에는 우리의 언어라는 것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에 의하여 정보를 얻고 언어에 의하여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컵이라고 말은 하지만 컵은 어느 정도 높이의 것까지만 컵으로 할 것인지, 입구는 어느 정도까지 큰 것이 컵인지 단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컵이라는 실체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컵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그것에 의해 가치판단을 합니다. 또 우리가 세계평화를 떠들어 대지만 미국이 말하는 평화와 중국이 말하는 평화가 같지 않습니다. 컵을 말하든 평화를 말하든 평소에는 컵이다, 평화다 하고 말하지만, 어느 날 내가 컵이라고 말하는 것과 저 사람이 컵이라고 말하는 것이 다름을 알았을 때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서로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을 하지만 이 나라가 말하는 평화와 저 나라가 말하는 평화가 다를 때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도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의 평화의 개념이 틀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실체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확정짓고 온갖 사물과 현상을 구분합니다. 말하자면,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세계에 살면서도 그러한 세계를 언어에 의지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러한 가공의 사물과 현상은 인간이 주관에 의하여 구분지어 놓은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물이라고 말을 하지만, 원래 깨끗한 물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은 자기의 필요에 의하여 깨끗한 물이라고 하지만 더러운 곳에 사는 벌레들에게는 더러운 물이 곧 자기들한테는 깨끗한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는 가치나 구별이 없는 세계를 인간은 언어에 의하여 구분하고 거기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합니다. 자기의 필요에 적합한 것이면 좋은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자기의 필요에 맞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것이 분별의 원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렇게 자기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사물과 현상의 실제의 모습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별지의 한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