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종50년특별기고 | 불공 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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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3-01 15:02 조회3,80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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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 잘하라
윤회에서 벗어나 법신과 함께
1980년 8월 9일. 원정 대성사께서 멸도(滅度)하신 날이다. 생로병사 희비애락의 육신을 벗고 윤회에서 벗어나 법신과 함께하셨다. 대성사께서 멸도하실 무렵을 기억하는 스승들의 말씀을 모아보면, 원정님은 평소 모습 그대로셨다고 한다. 죽음과 삶에 대해 조금의 두려움과 의심 없이 여여하고 묵연하셨다.
기력이 쇠하시자 병원으로 옮겼고 걱정하는 스승들과 신도들이 병실 주위에 모였다. 별다른 말씀을 남기시진 않으셨고 마지막 순간을 스승들이 지켰다. 남기신 말은 “불공 잘하라”는 당부. 평생의 법문을 다시 한 번 마지막 법문으로 남기셨다. 일체는 괴로운 것이나, 괴로움을 멸한 곳에 열반이 있다.
대성사님께서는 모친으로부터 불법과 연을 맺었다. 살아있는 것을 자비로 대하고 지혜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모친의 삶으로부터 보고 듣고 배웠는데, 밀교의 법을 만나고 체득한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다. 공식적으로 대성사님께서 밀교에 입문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당시에 복잡한 개인사가 있었는데 그를 살펴보면 생활 속에서 불법을 찾고 만사에 불공하라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대성사님의 아들 손순표님은 고려대학교 상과, 지금의 경영학과에 재학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난 후 소식이 끊겼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행적을 찾았지만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북한군은 승승장구 남으로 밀고 내려왔고 급기야 대구, 마산, 부산을 남기고 낙동강 전선에서 총공세를 벌이고 있었다. 대성사님이 계시던 밀양에서도 북한군의 포격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땅은 그야말로 한 뼘밖에 남지 않았다.
세월이 흉흉하니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생사를 찾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고 하루하루가 눈물에 젖었다. 풍문으로 대구 근처에 용하다는 박보살이란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 찾아가 들은 이야기는 “아들이 간신히 살아있기는 하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일심으로 기도하고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면 응답이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당신의 생사가 아니라 자식의 일이었기에 대성사님은 한 치 의심 없이 밤낮으로 ‘관세음보살’과 육자대명왕진언을 염했다. 어려움에서 간절함이 나오고, 지극함에 이르게 되니, 결국 마음을 다해 나아가면 성취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일심으로 오직 ‘옴마니반메훔’
먹고 눕는 일조차 잊고 오직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대성사님의 모습은 주변에 도인이 났다는 소문으로 번졌다. 몸과 마음이 모두 부동한 채 입으로 나오는 말은 오직 ‘관세음보살’과 ‘옴마니반메훔’ 뿐이다. 며칠 밤낮이 지나도 흐트러짐 없이 기도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그 소문을 듣고 밀양에 찾아온 이가 회당(悔堂) 손규상님이다. 한국 밀교사의 역사적인 사건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서울에서 피난길을 놓친 손순표님은 인민군에 잡혀 의용군에 끌려갔다.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다가 미군 포로로 붙잡힌다. 함께 있던 인민군 전사들과 의용군 동료들은 대부분 포격과 총격으로 사망했으나 목숨을 부지하고 포로가 됐으니 다행한 일이다. 그때가 바로 대성사께서 기도를 시작한 무렵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악몽과 같은 날이 이어졌다. 인민군은 수용소 내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수시로 인민재판을 벌여 사상이 다른 이들을 처단하고 있었다.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손순표님은 인민재판에 넘겨졌다. 죄목은 악질 유산계급으로 인민의 고혈을 빨아 호의호식한 죄. 자아비판과 비난이 이어지고 처형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 자의 죄에 대해 반론이 없으면 처단하겠소!” 말이 끝나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그자는 악질 계급이 아니오. 그자와 가족들이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그 집안도 가난한 농민 계급이오.” 밀양 출신 인민군 포로 하나가 나서서 변호한 덕분에 손순표님은 죽음의 문 앞에서 돌아 나올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이며, 기도의 성취이다.
목숨을 건진 대성사님의 아들은 포로 심사에서 남한 출신으로 분류돼 영천의 제14 포로수용소로 옮겨진다.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간 후 다시 미군 트럭으로 영천까지 갔다. 낙동강을 따라 국도를 타고 가면서 멀리 밀양의 집이 보였다. 어린 시절 뛰놀던 낙동강의 모래톱과 밀양강, 그리고 백산의 집이 어렴풋이나마 보인다. 그곳엔 자식 소식을 모르는 부모가 계시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음을 알 도리가 없다.
대부분 남한 출신의 포로가 수용된 영천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와 달리 죽음의 공포는 벗어난 곳이다. 대성사님의 아들은 돌에 밀양 집 주소와 자신의 이름, 그리고 부친께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적어 철조망 밖으로 던졌다. 지나가던 행인이 대성사님께 기별을 전했다.
포로가 석방된다는 소문이 들리면 대성사님은 도시락을 싸 들고 영천으로 향했다. 아무런 기약이 없었지만 소문 하나에도 희망을 걸고 먼 길을 찾아갔다. 그리고 7번째 되던 날 드디어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멸도로 보이신 일대사 법문
이런 곡절을 겪으면서 대성사님의 마음에 등불 하나가 켜졌다. 이 고해의 세상에서 고통에 빠진 수많은 이들에게 이 길을 전해야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이다. 밀교의 법을 몸으로 체득하고, 불공의 길을 밝히고, 세상에 진실을 전하는 문을 열었다. 잃었던 자식이 돌아온 후에 대성사님은 세상 교화를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그 이후의 일들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
역삼동 총지사가 완공된 후 만년의 대성사님께서는 늘 계단 아래 1층 바깥쪽에 앉아계셨다고 한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큰 의자를 내어놓고 앉아 일체 법계의 이치를 관조하셨다. 입을 다물고 고요한 모습으로 거의 움직임 없이 자리를 지키셨다. 신도들이 법당에 가다가 인사를 하면 간간이 아는 체를 하고는 또다시 침묵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세상사 고통스러운 일과 무너진 마음을 안고 원정님께 다가가 천 갈래 만 갈래 곡절을 쏟아 놓고 길을 물으면 “이렇게 이렇게 불공하면 감응이 있을 것이니, 법계의 답을 듣고 꼭 그대로 하시오.”란 답을 주셨다. 경전의 이야기를 외워 알음알이를 더해 듣기 좋은 이야기를 건네는 법은 결코 없었다. 자신이 체득한 대로, 그 간절함으로 나아가 불공을 드리고 원을 성취한 경험 그대로를 전했다.
성인이 세상을 떠나 더 만날 수 없음은 슬픈 일이나, 우리들은 때때로 곳곳에 그분이 남긴 가르침이 살아있음을 본다. 친절하고 간곡하게 불공법을 일러두셨고, 해야 할 바를 남겨두셨다. 무엇을 믿고 의지할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밝히셨다. 그러니 그 어떤 괴로움 앞에서도 대성사님이 남긴 길을 뒤따르면 될 일이다. “불공 잘하라.” 생활 속에서 매 순간 모든 일에 불공을 떠나지 않는 길이 멸도로 보이신 일대사 법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