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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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 | [지장스님의 향유] 그대는 불타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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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11-01 16:15 조회1,7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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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가 깨달음을 완성한 곳은 보드가야입니다. 보드가야에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서울의 남산만한 산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산은 ‘가야시사’라고도 하고 ‘브라흐마요니’라고도 부릅니다. 불교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힌두교의 성지입니다. 이 곳에는 부처님 당시 불을 숭배하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불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지도자는 삼형제였는데 그들의 성씨는 까사파 였습니다. 그래서 불을 섬기는 까사파 삼형제로 후대에 알려지게 됩니다.


 까사파는 한문으로 가섭이라고 음역되는데 우리가 아는 마하가섭존자와는 다른 인물들입니다. 삼형제 중에 큰 형인 우루벨라 까사파가 교단을 이끌었습니다. 보드가야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사르나트 즉 지금의 녹야원으로가서 전에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시 가야시사로 돌아옵니다. 까사파 삼형제는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지도자이기도 했으며, 붓다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루벨라 까사파를 찾아간 붓다는 하룻밤 묵기를 청합니다. 붓다의 방문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까사파는 머무를 방이 없다고 하면서 붓다의 청을 거절합니다. 반복해서 붓다가 요구하자 까사파는 만약 자려거든 사납고 위험한 독사가 사는 동굴밖에 없다고 합니다. 붓다는 상관없다고 하면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다음 날 사람들은 붓다가 뱀에 물려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뱀을 굴복시켜 자신의 발우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붓다가 뱀 때문에 죽거나 아니면 그곳을 곧 떠날 것이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게 되자 까사파는 붓다를 성가시게 생각했습니다.


 붓다는 그런 까사파를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게 됩니다. 어느 날 불을 피울 장작을 쪼개야 하는데 나무가 너무 크고 단단해서 수행자들이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붓다는 신통력으로 큰 나무를 작은 조각들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때 까사파의 제자들은 붓다가 보통의 인물이 아님을 알아보게 되지요. 얼마 후 모든 불씨가 꺼지게 되었고 새로 장작에 불을 붙이려 해도 불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붓다는 신통력으로 불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붓다의 언행을 지켜보던 까사파의 제자들은 점차 부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원래 자신들의 스승이 있었기에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스승 앞에서 둘러 가는 말로 붓다를 칭송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까사파는 신통력이 있을지는 모르나 자신처럼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제자들을 나무랐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붓다는 까사파에게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못한 것은 그대들이라고 말합니다. 까사파는 완전한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 때 붓다가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이말입니다.


 “그대는 불타고 있다네.”


 그때 당시 제사를 위해 주변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타고 있던 장작불을 가리키며 모든 존재가 불타고 있다고 말합니다. 불이 탄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첫 번째로 연소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장작불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 있는 과정입니다. 즉 실체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씨와 연료, 공기가 만나 매 순간 타고 있는 과정이지요. 잘 헤아려 보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즉 몸속의 세포, 분자, 원자들은 여러 조건과 원인들이 모여 작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기본적인 생명의 작용 또한 연소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영원히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붓다는 이런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일체가 불타고 있다. 보는 것이 불타고 있다. 보여지는 것이, 보고 있다고 아는 의식이 불타고 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보고 있다고 아는 의식의 만남이 불타고 있다. 이러한 만남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불타고 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현상들 또한 불이 타고 있는 과정과 같다고 설파합니다. 오늘날 뇌과학에서 정신은 신경에서 발생하는 신호, 혹은 시냅스 간에 주고받는 신호들의 무더기로 설명되지요. 부처님께서는 2,500여 년 전 이미 이런 파격적인 통찰력과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불타고 있다는 것은 만물의 보편적 특성인 것입니다. 불이 탄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욕망, 번뇌, 고통의 불길이 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불타오르고 있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태어남과 늙음, 죽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현상을 올바르게 통찰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온갖 반응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반응들은 결핍과 욕구, 감정, 의도들을 만들고 다시 이것들이 우리 자신과 타인을 열 받게 합니다. 열기가 너무 뜨거워 데이기도 하지요. 심리적 화상이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현상을 올바로 보고 이해하여 이러한 뜨거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일러줍니다.


 “수행자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보는 것, 보여지는 것 등등에 염오(厭惡, nibbidā)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離欲, virāga),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여기서 ‘염오’는 즐기지 않음, 무관심한 것, 무대응, 벗어나고 싶은 것 등의 의미이며, ‘빛바래고’의 의미는 번뇌로 염색된 것이 반대로 탈색, 퇴색되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설명해 줍니다. 아마도 자세하게 설명했으나 경전으로 암기되면서 핵심만 요약됐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까사파 삼형제와 그의 제자들은 결국 붓다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곧 머지않아 붓다가 말한 ‘할 일을 다 해 마친 상태’가 되지요.


 우리는 늘 불타고 있지만 스스로 자신이 불꽃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자신과 남에게 화상을 입히는 불꽃이 아니라 따뜻함과 빛을 주는 그런 불꽃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꽃은 조금씩 천천히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