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종50년특별기고 | 한국밀교, 그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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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7-06 22:49 조회3,57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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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밀교, 그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다.(1)
통리원 주축 ‘일사불란’ 체계 구성
1953년 8월에는 ‘심인불교건국참회원’을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종단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즉 신흥종단으로서의 정통성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대한불교’란 관사를 붙이고 ‘진각종’이란 종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원정 대성사는 깨달음의 요체 내지는 깨달음, 그 자체를 ‘진각’으로 명명하고 이를 ‘심인’이라는 말과 함께 매우 중시하고 강조했기 때문에 일부 승직자들은 법신불이나 법계라는 개념에 대해 ‘진각님’이란 말로 대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진각종은 신흥종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체성 문제로 법난을 겪기도 했다. 또 내부 조직이 갖추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풍파를 겪기도 하였으나, 회당조사의 폭 넓은 도량과 중후한 인품과 함께 원정대성사의 지혜와 박식한 교학이 바탕이 되어 종단은 나날이 발전했다. 종단의 재단법인화를 이룩하여 통리원을 주축으로 말단사원까지 일사불란한 체계로 운영되도록 한 것도 원정대성사의 구상이었다. 종단의 수장격인 ‘총인(總印)’이나, 스승을 지칭하는 ‘정사(正師)’, ‘전수(傳授)’등의 새로운 용어의 창출도 이 당시 원정대성사에 의하여 고안된 것들이었다.
종단 총인직으로 진각종을 이끌다
이후 1963년 회당조사가 62세의 비교적 이른 연세로 입적하고 원정대성사가 종단의 최고격인 총인직을 이어 받아 진각종을 이끌기까지의 기간은 한국현대밀교의 모색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밀교에 대한 개념은 단지 현교에 대한 반대개념 정도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즉 출가승단에 대한 재가불교라는 대비개념 정도에 머물렀으며 밀교의 심오한 사상체계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서 60년대 초에 걸친 진각종의 교리는 대체로 자신의 죄과에 대한 참회를 강조하고 효도와 사회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등의 초보적인 윤리수준에 불과했다. 그 당시에는 밀교에 대한 학술자료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밀교에 대한 폭넓은 견식을 지닌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958년에 원정대성사는 『총지법장(總持法藏)』이란 책을 편찬하면서 금강계만다라와 태장계만다라의 존상 배치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매우 간략하게나마 한국밀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 이 책에는 불공(不空)삼장이 한역(漢譯)한 『금강계삼십칠존례(金剛界三十七尊禮)』와 『발보리심론(發普提心論)』 그리고 『무외삼장선요(無畏三藏禪要)』를 한글로 번역하여 게재하고 있다. 비록 이 책은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밀교서적은 아니지만 한국현대밀교의 초창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책의 구성형태를 보면 원정대성사는 이 책을 번역하여 엮으면서 밀교를 통하여 진각종의 교리체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의도가 역력하다. 그러나 이러한 학술적인 접근태도는 회당조사에게 크게 인식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당시 원정대성사는 진각종이 초기의 초보적 교리를 탈피하여 정통밀교종단으로 거듭나기를 염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참회를 통하여 심인을 밝히고 진각에 이른다는 초창기의 교리체계로서는 대중을 교화하기에 무리가 따른다고 보고 전통적 밀교수행법을 수용하려고 했으나, 회당종조의 반대에 부딪혀 그러한 의도는 좌절되었다. 원정대성사로서는 어쨌든 종단의 창종주이며 선배였던 회당조사의 뜻을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정대성사는 비로자나불을 교주로 밀교적인 교리체계를 수립해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각종이 참회원으로 불리던 초창기에는 관세음보살진언인 ‘옴마니반메홈’과 함께 남자교도는 ‘단야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라는 아미타불진언을 함께 염송하고 있었으며 특별한 결인도 없었는데, 이후에는 ‘옴마니반메훔’ 한 가지만 염송하고 결인은 금강계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을 채택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것은 원정대성사가 관세음보살의 진언염송만으로는 밀교에서 주장하는 삼밀(三密)의궤에 맞추기 어려웠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밀교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을 채택하여 신밀(身密)을 보완함으로써 밀교종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회당조사의 수구적인 태도와 원정대성사의 정통밀교의 수립에 대한 타협점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교리적으로 무리였던 것이 이후에 판명이 났다. 즉 원정대성사가 진각종의 총인(總印)직을 승계하여 진각종의 기틀을 탄탄히 하여가던 1968년, 한일불교도대회가 해인사에서 개최된 적이 있었다. 원정대종사도 총인으로서 진각종을 대표하여 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때만 해도 한·일불교도 간의 교류가 드문 때라 각 종단의 소개와 함께 상호의 관심이 각별했다. 특히 신흥종단으로서의 진각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일본의 대표단 일부가 진각종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방문에서 일본대표단은 전통불교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진각종의 심인당 내부를 둘러보고 수행방법에 대해서도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특히 이들은 한글로 쓰인 본존에 해당하는 ‘옴마니반메훔’에 대한 설명을 듣고 또 이 진언을 염송한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갔으나, 금강계대일여래의 지권인을 수인(手印)으로 한다는데 대해서는 수긍을 하지 못하고 상당히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즉 이들은 삼밀의궤가 정확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밀교의 의궤는 신(身)·구(口)․의(意)의 삼밀이 정확하게 일치해야하는데, 진각종에서의 수행법은 비로자나불의 결인인 지권인에다 진언은 관세음보살의 진언을 염송하므로 신밀과 구밀이 일치하지 않아 근본적으로 법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육자진언을 주로 염송한다면 거기에 대한 소의경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러한 직접적인 지적에 원정대성사는 몹시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확실한 소의경전과 경궤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수행법이 아니고 회당조사의 심득에 의하여 점차로 갖추어진 수행법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에 대응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