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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 혜학이란 무엇인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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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3-30 11:36 조회4,4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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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학이란 무엇인가? (4)

 

분별을 지닌 한 괴로움은 있다

진리의 세계에서 바라보면 본래는 가치나 구별이 없는 세계를 인간은 언어에 의하여 구분하고 거기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합니다. 예를 들면 휘발유는 맹물보다 비쌉니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다면 휘발유보다 먹는 물이 훨씬 귀할 것입니다. 추운 곳에 고립되어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눈앞의 금덩이보다도 추위를 막아줄 따뜻한 모포 한 장이 더 소중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에 적합한 것이면 좋은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자기의 필요에 맞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것이 분별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렇게 자기의 필요에 따라 판단하고 자기의 생각에 따라 이름을 붙이며 가치를 매기기 때문에 사물과 현상의 실제의 모습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별지라는 것은 이러한 한계를 지닌 지혜입니다.

 

분별지로써 대상과 나를 나누어 보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의하여 분별이 생기고 분별에 의하여 집착이 생깁니다. 집착에 의하여 번뇌가 생기고 번뇌에 의하여 업이 일어나고 업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울에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듯이 모든 것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집착이 생기지 않고, 집착이 없으니 번뇌도 없고, 번뇌가 없으므로 괴로움도 생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를 분별이 없는 지혜, 즉 무분별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옛날 선사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무분별의 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 무분별지는 분별을 끊고 번뇌를 끊으며 집착을 끊는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이것이 진리다, 혹은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분별도 없으며, 진리와 그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라는 의식도 없으며, 진리와 완전히 일치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도 보지 않는다거나 어떤 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분별하지 않는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목석이 되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눈을 감고 어떤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보고 있던 것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또한 이미 분별이 된 것입니다. 어떤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하는 자기라는 것이 이때 이미 분별하여 의식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보지 않는다.’라고 할 때, 이미 나라는 것이 그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과 분별되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분별인 것입니다. 만약 정말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하면 그것은 기절이나 졸도한 상태와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또 그것은 지나치게 깊은 지()의 선정에 든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지혜가 작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떤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며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진리와 일체가 된 지혜라고 하더라도 자기라는 존재, 혹은 정신이 진리에 용해됨이 없이 일체화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자기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진리와 일체화한 지혜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몰입되어 있을 때에는 자기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대상과 일체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작용하는 것이 무분별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분별지라는 것은 번뇌를 끊는 깨달음의 지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분별지만으로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은 될 수 있어도 중생을 구제하는 활동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분별지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분별이라는 것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는 물론이고 구제 대상조차도 인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라는 자체가 인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불보살은 이미 얻은 무분별지에 의지하면서도 대상을 의식하여 구별하는 지혜를 작용시킵니다. 이 지혜는 당연히 분별이 있는 지혜, 즉 유분별지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유분별지에 의해서 불보살들은 중생구제의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분별지는 무분별지를 얻기 전의 유분별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미 무분별지를 얻은 후 그 무분별지에 의지한 유분별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분별지를 무분별후득지(無分別後得智)라고 하고 혹은 간단하게 후득지(後得智)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하여 무분별지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히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혹은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합니다.

 

분별과 무분별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선행을 베푸는 경우에 있어서도 베푸는 나와 베풂을 받는 남이라는 분별이 생깁니다. 또한 이 경우에도 구제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분별이 생깁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구분과 분별도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분별이 일어나게 되면 구제나 보시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도 보거나 듣거나 하는 인식 대상에 집착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집착한다는 것은 번뇌를 가져옵니다.

무분별지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제활동이나 보시 등과 같은 선행에서도 오히려 집착이 생겨납니다. 집착이 나쁘게 작용하면 상대방을 낮추어 보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말하자면 차별심에 의한 구제활동이나 보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손해나 이익을 따져 보거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기대하여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