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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 혜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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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12-29 14:26 조회4,5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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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학이란 무엇인가?

 

유루지와 무루지

불교에서 여러 가지 선정을 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즉 선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든 괴로움을 벗어버리고 열반에 이르기 위한 지혜를 획득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의 신행활동을 통하여 보시를 하고 계를 잘 지킨다고 하여도 선정의 지혜가 없으면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궁극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모든 괴로움을 벗어버리고 대자유를 얻게 하는 그러한 지혜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에 입문하여 불교도로서 부처님의 말씀이 적힌 경을 읽고 훌륭한 법사님들에게 법문을 듣고 계를 지키며 보시행을 하는 등의 모든 신행활동은 결국은 다 이 선정을 잘하기 위한 기초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선정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정을 통하여 어떤 황홀한 상태를 경험한다거나, 정 그 자체의 편안함에 도취되어 그것을 즐기는 것은 바른 선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마경(魔境)이라고 합니다.

 

외도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선정에 잘못 몰입되어 그러한 신비적 상태에 도취하면서 그것을 탐하는 것에 그치고 지혜의 개발은 등한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세간의 도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종류의 선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한 사람들은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두 마경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깨달음의 지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럴싸한 말을 해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무명의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번뇌 가운데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선정의 위험에 대해 주의를 하라고 옛날부터 엄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정을 배울 때에도 바른 스승 밑에서 바른 방법을 배워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른 선정을 가르쳐 줄 분들이 무척 드물다는 데에 또한 현실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무튼 정학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선정을 즐기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서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자면 불교의 목적은 오로지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위한 것입니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것은 결국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궁극의 즐거움을 얻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무한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것을 어려운 말로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계학을 통하여 마음을 바로 다스리고, 정학에 의하여 정신통일을 이루며 그러한 상태에서 지혜를 개발해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계혜의 삼학에 의해 얻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삼학에서 말하는 계도 정도 그것이 불교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혜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혜가 빠지게 되면 계도 정도 그 자체로서는 별 의의가 없는 것이 됩니다.

 

혜는 깨달음에 관한 것이면서도 사회적, 세간적인 지혜도 포합됩니다. 그러나 혜학(慧學)에서 말하는 혜는 깨달음에 관한 것에 한정됩니다. 이것을 반야(般若;paññā, prajñā)라고도 하며, 특히 지혜라는 말을 써서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혜학에서 말하는 지혜는 깨달음에 관한 지혜이며 세간 일반에서 말하는 지혜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지혜에는 번뇌의 유무에 따라 유루의 지혜와 무루의 지혜로 나누어집니다. ‘라는 것은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번뇌가 남아 있는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고 하며, 번뇌가 완전히 멸한 상태의 지혜를 무루지(無漏智)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물론 무루지입니다. 세간의 지혜는 기껏해야 현실을 타개하여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을 이루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한 지혜는 또 다른 번뇌를 가져옵니다. 궁극적으로 이 사바세계의 모든 괴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번뇌, 즉 괴로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는 세간의 지혜를 유루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신 분의 지혜를 무루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도가 되어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 무루지를 얻는 것입니다. 설혹 이생에서 무루지를 얻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 무루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정신이고 보살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