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 지혜의 완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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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7-06 22:50 조회3,88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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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완성(2)
계·정·혜 삼학으로 불도를 이루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여 지혜를 얻게 되는 과정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처럼 무조건 믿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불교서적도 사 보고 경전도 읽어 봅니다. 그리고 훌륭한 스승을 찾아 법문도 들어 보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기의 알음알이를 점차 넓혀 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가 되면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경전의 이 말씀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저 법사님의 말씀은 정말 맞는 것인지 사색을 통하여 자기가 배운 것을 확인도 해 보고 의심나는 것은 스스로 해결해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수행을 병행하면서 자기가 배우고 생각했던 것들을 실천해 봅니다. 그러다 보면 ‘이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스스로 체득이 됩니다. 문․사․수의 삼혜는 이러한 과정을 지혜의 획득면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즉 언어를 통하여 문혜와 사혜를 기른 다음에는 수혜를 통하여 언어를 초월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분별지이고 무루지라는 것입니다.
혜학의 완성으로서 계․정․혜의 삼학은 완성되는 것인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무루지와 무분별지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분별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번뇌가 없는 지혜가 무루지와 무분별지인데, 이러한 지혜에 의하여 괴로움을 완전히 단멸하고 열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선행을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나와 남이라는 것이 구분되고 집착이 일어납니다. 즉, 번뇌가 남아 있는 유루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항상 여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선을 행하든 수행을 하든 항상 분별과 집착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초월하도록 해야 합니다.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뭉뚱그려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 말이 모순된 것 같지만, 중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별이 없는 가운데에도 분별하는 지혜가 있는 것을 무분별후득지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러한 것을 다른 말로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이라고 합니다. 지혜를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듯이 지혜의 완성을 지혜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의 입장에서 분별과 집착을 벗어난 지혜가 혜학의 궁극 목표이며, 계․정․혜 삼학의 완성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지혜바라밀로써 해탈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사의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으시며 우리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십니다.
이상과 같이 계․정․혜 삼학을 계-정-혜의 순서로 설명을 드렸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이러한 차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 세 가지는 병행하여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합니다. 계가 없는 혜학이 있을 수 없고, 혜가 없는 정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계를 지키는 데에도 지혜가 있어야 하며, 혜학의 완성을 위해서는 정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 세 가지는 어느 것도 먼저라고 할 것이 없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과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이 세 가지가 동시적으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겠습니다.
《해탈도론(解脫度論)》에 보면 계, 정, 혜에 대하여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계, 정, 혜를 해탈의 길이라고 한다. 계는 위의(威儀)의 뜻이요, 정은 산란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혜는 깨쳐 안다는 뜻이요, 해탈은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또 계는 악업의 때를 없애고, 정은 얽매임의 때를 없애고, 혜는 잘못된 소견의 때를 없앤다.
또 세 가지 선으로 구별하자면 계는 초선(初善)이요, 정은 중선(中善)이요, 혜는 후선(後善)이다. 계를 초선이라고 하는 것은 정진하고 계행을 지키는 사람은 퇴전하지 않고, 퇴전하지 않기 때문에 기쁘며, 기쁘기 때문에 즐겁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선정이 되므로 초선이라 한다. 정을 중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으로써 일체를 시랑 그대로 보고 아는 까닭이며, 혜를 후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실상 그대로 보고 아는 까닭에 미혹되지 않고, 미혹되지 않는 까닭에 탐욕을 버리고, 탐욕을 버린 까닭에 해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실천방법은 모두 이 계․정․혜 삼학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삼학을 공부하는 것을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즉, 농부가 씨를 뿌려 놓고 가꾸노라면 자연히 곡식이 열매를 맺듯이, 혹은 닭이 알을 품고 있으면 자연히 병아리가 나오듯이 삼학을 닦으면 자연히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비구는 계학, 정학, 혜학, 이 세 가지 공부를 수시로 잘 하면 ‘오늘 중으로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이 잘 해탈했으면, 또는 내일이나 훗날에 번뇌를 끊고 마음이 잘 해탈했으면.’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비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오늘이나 내일, 혹은 훗날에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이 잘 해탈할 것이다. 그가 수시로 계학, 정학, 혜학을 부지런히 닦는 한 때가 되면 자연히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할 것이다.
이 말씀은 《잡아함경》에 나오는 말씀인데 농부가 농사짓는 것처럼,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계․정․혜의 삼학에 힘쓰면서 정진하면 해탈을 바라지 않아도 자연히 때가 되면 해탈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의 모든 실천수행방법은 계․정․혜 삼학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정․혜 삼학에 의하여 불도의 수행은 완성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