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 | 제사(祭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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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3-30 11:44 조회4,36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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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祭祀)
이번 설 명절 제사는 자석사에서 올리기로 했다. 코로나 방역이 한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88세가 되신 어머니가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니의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전통적인 유교 가문의 동래 정씨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19세가 되어 2남 4녀의 장남인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는 대대로 내려온 조상의 제사를 맏며느리의 숙명이라 받아들이며 지금껏 모시고 사신 분이었다.
신축년 정월 초하루 아침,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자석사를 찾았다. 서원당 문을 들어서니 법당 정면의 옴마니반메훔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로 다가왔다. 이미 단상 위에는 사과, 배, 바나나 등 과일 공양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 촛불이 법당을 밝히고 있었다. 우리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과 조상님께 경건한 마음으로 향불을 올렸다.
시작을 알리는 죽비소리에 마음을 한곳에 모았다. 청아하게 들려오는 옴마니반메훔의 음악 소리는 우리를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듯했다. ‘무상게 독송’을 할 때는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날 때에 어느 곳에서 왔으며,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을 묻고 있었다. 나는 이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다. 단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것이 언제이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죽음은 어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 만 알뿐이다. 그것이 오늘의 조상이고 내일의 나인 것이다.
제사의 기억은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만큼이나 까마득하다. 아주 어렸을 때로 기억한다. 제사 음식이 먹고 싶어 밤늦게 끝나는 기제사를 기다렸지만 끝내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사는 이미 다 끝나 버렸고 지난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 어른들의 모습에 온종일 기분이 상했다. 처음으로 아버지로부터 제사에 참석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아들로서의 존재감과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아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과 나란히 서서 제사상을 향해 절을 올릴 때는 끝없이 이어져 온 나의 뿌리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80년대 서울에서 살 때였다. 설 명절에 고향에 가기 위해 차를 갖고 나섰다가 교통체증으로 꼬박 하루가 걸려서야 부모님 집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당시 서울역에는 기차 예매표를 구하기 위해 노숙을 하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TV 9시 뉴스에 방송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이를 마다하지 않고 누구나 할 것 없이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것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며 도리라고 생각했다. 언제인가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강원도 어느 콘도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명절 휴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말로만 듣던 명절 제사를 콘도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움과 개탄을 금치 못했다.
세월은 흘러 아들은 아버지가 되었고 아버지의 아들은 그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아버지를 닮아 갔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아들 3형제를 불렀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우리도 변해야 한다. 앞으로 기제사는 모아서 한 번으로 지내도록 해라. 조부 조모 제사는 자식인 작은 아버지와 막내 고모가 아직 살아계시니 돌아가실 때까지만 지내주면 좋겠다. 모든 책임은 아비인 내가 안고 간다.”라고 엄숙하게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사대봉송의 제사를 철저히 지켰던 분이셨다. 아버지는 닥쳐올 시대의 변화를 이미 예상하셨을까. 아니면 아들들에게 당신이 평생 지고 왔던 제사의 짐을 조금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이를 제사의 1차 혁명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현실은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다. 백세 시대가 되면서 요양원이 넘쳐나고 있다. 혹자는 이를 21세기 고려장이라고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선대에서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제사의 전통도 도도한 시대의 변화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명절이 되면 공휴일을 틈타 공항은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조상의 성묘나 벌초에는 나이 먹은 노인네만 참석하고 젊은 사람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구동성으로 말을 한다. 우리 세대가 끝나면 이마저 사라질 것이라고.
마지막을 알리는 반야심경이다. 나는 다시 소리를 내어 따라 읽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재아재 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 사바하.” 색즉시공 공즉시색……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자석사를 나와 울산에 계시는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어머니는 집에 혼자 계셨다. 집은 텅 비었고 반기는 어머니의 모습은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여태껏 보아왔던 명절의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아들 3형제가 다 모였다. 그제야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의 속내를 끄집어내셨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겠다. 이 집안에 시집을 와서 70년 가까이 성심성의껏 조상을 모셨다. 그사이 세상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제사가 언제까지 이어 갈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너희들에게 내 생각을 말한다. 앞으로 기제사와 명절 제사를 절에 올렸으면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유골만 남기고 제사는 절에 올려주면 좋겠다.” 아들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제사의 2차 혁명을 단행한 것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어머니 집을 나왔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가 해운대를 향하는 고속도로를 접어들기까지 어머니의 얼굴은 계속 뒤따랐다. 불쑥 아들이 한마디를 던졌다. “아버지, 할머니 말씀대로 제사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차 안은 다시 침묵이 흘렀다. 달리는 차는 제 속도를 못 이기는 듯 거침없이 달렸다. 터널을 지나고 집이 가까워져 왔다. 나는 저 멀리 산 너머로 저녁노을이 붉게 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