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 | 자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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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12-13 11:28 조회3,54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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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큰 눈송이가 초록빛, 진갈색의 나무들에 찬찬히 내려앉는다. 마치 이 세상 속에 나 혼자 존재하고 있는 듯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한 길 위에 고개를 들어 내리는 눈들을 하나 하나 눈에 담고 있는 어린 모습의 내가 서 있다. 내리던 눈들이 내 발 아래 점점 쌓여가고 그렇게 쌓이는 눈들이 이내 내 발을 감싸면 마치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들어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그 언젠가, 기억되는 내 삶의 첫눈은 유난히도 하얗고 아름다웠으며 따뜻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그 풍경이, 자연이 답답한 도심을 벗어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라 나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듯하다. 그럼 나도 ‘그래 언젠가는 내가 꼭 너에게로 돌아가마’ 하고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한숨에 숨겨 내뱉는 것이다. 자연은 너무나도 큰 존재라 그에 비교하여 한없이 작은 존재인 내가 마음껏 투정을 부려도 얼마든지 다 받아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유난히도 힘이 드는 하루면, 그 어떤 생각도 하기 싫은 날이면 내 기억 속 첫눈 내리던 그 날처럼 그냥 모든 것을 이곳에 남겨둔 채 다시 자연의 드넓고 포근한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저 자연 속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 날이 더해질수록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버티고 서서 그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그저 그렇구나 하며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또 어떨 때는 지나가는 이에게 그 커다란 몸집으로 그늘과 쉴 곳을 마련해주는 그런 나무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가는 바람에, 떨어지는 빗방울에 쉬이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서서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나무와 같은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하는 자신만의 상이 커져가고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 라고 하는 나에 대한 타인의 정의 또한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가 만든 상과 타인이 정한 자신에 대한 정의가 커지다 보면 결국 ‘그래 난 이런 사람이야’라는 틀에 갇히고 마는데, 그러한 틀에 갇히는 순간 정의된 대로만 행동하며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마치 암묵적인 규칙을 깨는 일인 듯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끝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삶은 편협한 사고와 시각을 갖게 하고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삶을 살게 만든다. 이런 상태에서는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뿌리가 흔들리는 나무가 될 것이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형태가 변하지만 물이라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무서운 놀이기구를 못 탄다고 하여 나약하고 강하지 못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러한 일로 당신을 정의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동그란 모양의 그릇에 담겨있다고 하여 물이 동그랗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람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했다고 하여 이런 사람이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행동했을 때 상대가 나를 어떻게 정의내릴지에 대해 과도하게 생각하며, 타인에게 약해보이지 않으려 또는 무시당하지 않으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틀에 자신을 많이 가두곤 한다. 이리 사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드는지도 모르는 체 말이다.
이 모습이든 저 모습이든 다 나의 한 부분이니 본질적인 나를 뿌리로 두고 여러 모습의 나를 가지와 나뭇잎으로 삼아 불어오는 바람이나 내리는 비와 같이 외부적 환경과 자극이 나를 흔들었을 때 자연스레 그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리며 너는 바람이구나, 비구나 이렇게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진정 뿌리 깊은 나무일 것이다.
외부환경과 자극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를 양분 삼아 성장해 나가는 나무처럼, 또 주어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되 본질을 잃지 않는 물처럼. 이렇게 자연과 같이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와 물이 그냥 나무와 물이듯, 쉬운 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행하다 보면 어느새 원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게 본래의 나인 듯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자연스럽다’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여 이상함이 없다. 순리에 맞고 당연하다. 힘들이거나 애쓰지 아니하고 저절로 된 듯하다. 라는 ‘자연스럽다’의 사전적 의미들처럼 그냥 자연(自然)처럼 사는 것이 제일 자연스러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