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 편안하고 친절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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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10-05 13:58 조회3,47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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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들에게 무엇보다 편안함과 친절함을 선사하자”
필자가 불교를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누가 강요하지 않아 좋아서였다. 예전에는 거리를 지나다보면 믿음을 권유하
는 이들을 많이 만나곤 했는데, 지나치게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들이대는’ 모습에 거리감을 두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일도 남이 시켜서 할 때보다 자발적으로 할 때 신이 나지 않던가.
어느 분이 필자에게 하소연을 했다. 절에 가면 좀 편안할 줄 알았는데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힘들더라는 것이다. 예불도 때에 맞춰야 하고, 공양도 울력도 수행도 때에 맞춰 해야 해서 힘들더란다. 또 잘못해서 악업을 지으면 지옥 간다고 하니 겁까지 났다고 한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줄 알았더니 이런 줄 몰랐다고 투덜댔다.
그런데 이 분이 어느 날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본래 성불成佛해 있음을 알아차리면 힘써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접하고는 안도가 되더라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전통은 우리 모두 본래 부처여서 누구나 부처임을 깨달으면 부처의 행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 분은 이런 소식을 늦게 접했나 보다. 아무튼 이 분은 그 후로 스스로 졌던 짐을 내려놓은 듯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불교 신행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찾지 못해 난행고행 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에 비하면 우리는 부처님이 제시한 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성불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깨우침을 근거로 순간순간 ‘붓다로서’ 살도
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불교를 믿고 실천하는 일은 중층적이라 할 수 있다. 중생이 부처가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면서도 중생이 이미 중생 아닌 부처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일이든 노력해서 달성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적지 않다. 예부터 수행을 잘못해서 얻은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법문을 듣다가 졸아 부처님께 야단을 맞았던 아누룻다는 분심에 밤잠도 자지 않고 정진하다 시력을 잃었다. 물론 정진하여 마침내 천안통을 얻기는 했지만 댓가를 치렀던 셈이다. 그래서 불방일不放逸, 수행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되지만 쾌락주의에도 고행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중도中道의 바른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연을 강조하는 불가에는 ‘오는 사람 잡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인 포교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받는다. 인연을 그저 수동적인 흐름으로만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측면을 강조하지 않은 탓이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는 인연을 제대로 지어가야 한다. 초심자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편안함과 친절함을 선사하는 게 좋겠다. 절에
처음 오는 이들에게 의무를 너무 부과하면 다들 달아나기 바쁘니 몇 사람 남겠는가. 특히 대중매체인 방송의 경우에는 쉽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주를 이뤄야 한다고 본다. 물론 중급과 고급 과정도 일부 배치해야겠지만 불교에 접근하는 안내자 역할에 중점을 두자는 취지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선지식이나 전문기관을 찾아 본격적으로 배우도록 유도하면 된다. 대중매체와 전문기관 간의 역할 분담이다.
불교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조망 속에서 지금 이 자리의 행복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리이타自利利他, 항상 서로에게 행복이 되는 일을 행해야 한다. 나와 남이 순서가 따로 있지 않겠지만 내가 행복할 때 남도 행복할 수 있다. 내가 불안하면결코 상대를 편하게 해 줄 수 없다. 무엇보다 스스로 안심입명安心立命 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