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 지혜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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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05-27 12:14 조회4,01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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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완성
대부분의 종교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어떤 종교는 믿음이 없으면 종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에 불합리한 부분이 있어도 무조건 믿어야만 그 종교의 일원으로 인정이 됩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해도 믿어야 하고 처녀가 애를 낳았다고 해도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다가는 불경스러운 자라고 하여 그 집단에서 매도당하고 추방되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불신자라 하여 처형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아는 스페인의 유명한 한 불자는 신학교에 다녔었는데 의심스러운 교리에 회의를 품고 질문을 하였다가 가차 없이 쫓겨난 다음에 방황 끝에 불교를 만나 삶에 새롭게 눈을 떴다고 합니다. 청소년기에 자기 삶의 기반이었던 신학교를 쫓겨 났을 때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종교에 회의를 가져도 내색하지 못하고 거기에 목을 매는가 봅니다.
어리석은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정말 황당한 기사가 며칠 전 뉴스에 올라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을 14살이 되도록 키웠는데 아무리 봐도 자기 아이 같지가 않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를 빼다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다그쳤더니 목사랑 새벽까지 아이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 일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억울한 남편은 유전자 검사를 했더니 이 아이와 목사의 유전자가 99.9%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결과에도 이 교회의 목사는 자기로서는 애 빨리 가지도록 그 부인과 같이 기도해 준 일 밖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억울한 남편은 교회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더 황당한 것은 그 교회의 신자들이 목사 말대로 성령이 태어난 것이 맞다면서 단체로 이 남편의 일인시위를 방해하는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21세기에 코미디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잘못된 믿음은 사람을 이렇게 어리석게 만듭니다.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이런 어리석은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불교도 물론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따져보고 이해한 다음에 믿는 믿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경전에 써져 있다거나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거나 어떤 훌륭한 스승이 말했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거나 심지어는 붓다인 당신이 말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믿지 말고 진리에 합당한 지 스스로 잘 따져보고 납득이 되면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을 말합니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합당한지 스스로 잘 이해한 다음에 믿고 그것을 행하여 증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불교도가 되려면 지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지혜와 자비를 계발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세간의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우리를 괴로움에서 영원히 건져줄 궁극적 지혜라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지혜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들에게는 미약하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생득生得의 지혜’라고 하는데, 물론 그 지혜는 번뇌가 남아 있는 ‘유루有漏의 지혜’로서 완벽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를 끊기에는 그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그러한 지혜를 키워나갑니다. 그러한 수행이 바로 계.정.혜의 삼학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키워나가는 방법을 특히 지혜의 방면에서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단계에서 얻게 되는 지혜를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라고 합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문.사.수의 삼혜三慧라고 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생득의 지혜와 합하여 사혜四慧라고 합니다.
먼저 문혜라는 것은 듣는 것에 의하여 생겨나는 지혜를 말합니다. ‘문’이라는 말에는 꼭 듣는 것만 아니라 견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득의 지혜를 가지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경전을 읽고 공부하여 얻게 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즉, 학습이나 공부를 통하여 얻게 되는 지혜를 문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닦는 것은 우선 가르침을 배우고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주가 될 것이고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 예를 들면, 불교 이외의 것을 듣고 배우는 것은 삼혜 가운데의 문혜로 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지식은 넓힐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참다운 지혜를 개발하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혜라는 것은 사색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문혜에 의하여 얻은 가르침의 내용을 사색하는 것에 의해서 얻게 되는 지혜가 사혜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내용을 주체적으로 사색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혜입니다. 듣고 배운다는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 사색에 의하여 듣고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혜라는 것은 실천에 의하여 얻게 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때의 실천이라는 것은 선정을 비롯한 불교의 모든 실천법을 말합니다. 사색에 의하여 얻은 지혜를 실천에 의하여 스스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보고 듣고 배워도 스스로 사색해 보는 것이 없으면 그 가르침은 자기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참다운 지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교에서도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해서는 독단적이 되기 쉽습니다. 열심히 듣고 배우면서 또 그것을 스스로 사색하여 소화함으로써 그 듣고 배운 것이 비로소 참다운 자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며 자기 스스로 그것을 체득해 보아야 합니다. 수혜는 특히 선정을 통하여 그러한 지혜를 스스로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축구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무리 많이 듣고 배워도 축구경기하는 것을 구경해 보지 않으면 축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축구에 대하여 알고 축구경기를 구경하여 축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고 해도 자기가 실제로 공을 차보지 않으면 축구의 묘미를 모를 것입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배워도 그 말씀을 음미하여 스스로 사색해 보지 않고는 그 깊은 뜻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의 내용을 스스로 실천해 보지 않고서는 불도를 제대로 행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혜라는 것은 이처럼 실천에 의하여 얻는 지혜로서, 이때 비로소 지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혜가 체득될 때에 이것을 깨달음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득의 지혜와 문혜, 사혜, 수혜는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득의 지혜를 통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문혜가 생기고, 문혜를 닦은 다음 사혜를 닦으며, 또 더 나아가서 수혜를 통하여 참된 지혜를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