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성성취 | 나의 행복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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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2 14:04 조회5,09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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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찾기
가을걷이가 끝난 수계사 앞 들판은 어느날 부턴가 떼까마귀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때까마귀는 북쪽 추운 곳에서 날아와 남쪽에서 겨울을 보낸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수백마리씩 무리를 지어 떨어진 낱알과 작은 벌레를 먹는다. 사택을 나와 서원당으로 가는 짧은 순간이지만 나를 반겨주는건 요녀석들 뿐이다.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새장에 갇혀 주인이 주는 먹이와 보살핌으로 사는 새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로는 삶을 사는 새중 어느 새가 더 행복할까?’
중국의 장자는 집에 묶인 망아지와 벌판을 달리는 망아지를 달리 보았다. 하지만 진정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비를 푼 망아지와 새장을 벗어난 새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랬으면 행복할텐데, 저랬으면 행복할거야”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외부의 조건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행복의 조건은 외부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 즉, 나의 받아들임에 있는 것이다.
나는 군시절을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에서 보냈다. 매일 야간 근무를 나갈 때면 대화의 상대는 하늘의 별들과 묘지 뿐이었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그리고 달빛을 받아 붉게 물든 묘비를 보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를 되뇌었다.
하지만 고민하고 고민할수록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뿐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한 그 순간부터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난 초등학교 때부터 죽기보다 가기 싫었던 곳이 학교였고, 사람을 만나는 것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하루하루가 근심 걱정 불안의 연속이었고 밤에 잠자기 전 내일 다시 아침이 시작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였던지 어릴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부모님의 영향이 컸지만 불교가 나와 맞다고 느꼈다. 고등학교 1학년때 부산 광안동 자석사 옆으로 이사한 후부터는 자석사에 약수물을 뜨러 다니곤 했다.
고등학교때 불교반 활동을 했고, 대학때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법전을 펴놓고 사법고시시험을 준비하고 있을때 옆에서 숫타니파타를 읽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대학졸업 후 첫 사회생활에서 좌절을 맛본후 우울증으로 1년 정도 집밖을 나가지 않았을 때 나를 다잡아 주셨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총지종의 교도였다. 매일 절에서 살다시피 했고 그런 어머니를 가족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어머니가 다 가족들을 위해서 자석사에 다니셨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의 불공공덕으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안다.
어머니께서는 “너는 집에 있으면 안된다. 절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며 총지종으로 들어갈 것을 자주 말씀하셨다. 처음은 그 말이 귀찮고 듣기 싫었지만 어머니의 진심어린 눈물을 보고난 후 총지종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종단에 들어온지 벌써 15년이 흘러 부족하지만 어엿한 총지종의 정사가 되었다. 심하게 말을 더듬던 어린아이가 이젠 집공도 곧잘 하고 설법도 곧잘 한다. 정사로서 지난 3년 동안 했던 말이 태어나서 30년동안 했던 말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부처님께 말 잘하게 해달라고 빌기도 많이 빌었는데 부처님께서 나를 조금 어여삐 여기신 것 같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행복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란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었다는 것을, 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단지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생각하면서. 매순간 순간의 바른행동과 바른 말, 바른 생각이 모여 나의 바른 삶이 된다는 것을. 행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불행한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행복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