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 | 가을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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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1-28 14:38 조회5,47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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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
“아이고, 정사님 잘 좀 던지시소~”
“잘 좀 받으소~”
감이 떨어질 지점 쯤 밑에서 보자기를 펼쳐 들고 허둥대는 두 사람만큼이나 자석사의 가을걷이(?)가 분주하다. 서원당 안에서 창가로 시선을 두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던 붉은 대봉감이 우르르 떨어지는 찰나이다. 하늘 높이 키를 뻗은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새들에게 쉼터가 되고 먹이까지 나누어 준 감나무 덕분에 새가 종일 재재거리니 도심에서는 귀한 자연의 소리를 선사받기도 했다.
한 철 내 여러 눈들과 마음을 앗아가던 감들을 더 오래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커지지만 어쩔 수 없이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지난 자성일에는, 작년에 비해 유난히 알이 굵고 실한 토란을 캐어 노보살님들이 껍질을 벗겨 삶은 다음 햇빛과 바람에 말려 두었다. 들깨로 볶는 등 내년 공양실 반찬에 짬짬이 맛을 낼 식재료이다. 봄에 도량 구석구석 씨를 뿌리고 아기 돌보듯 가꾼 보살님 덕분에 유기농 채소로 한 철동안 공양시간이 건강하고 풍성했다.
마당 귀퉁이 작은 텃밭에는 오래지 않아 뽑혀질 배추들이 짙은 초록의 이파리를 드리우며 야무지게 자라주고 있다.이제 배추 수확을 끝으로 자석사의 텃밭은 한동안 결 고운 고요가 자리를 잡을 것이다.
한 때의 분주함이 일시 정지 되고 두터워진 삶의 두께가 다음 해를 기약하려는 서로의 암묵적인 약속을 지키는 시간이 되리라 한다.
‘눈 깜짝 하고 나니 일 년이 흘렀다’라는 어느 보살님의 농 섞인 한탄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굳이 곱십지 않아도 세월의 물살은 유유히 흐른다. 나 역시 돌아보니 많은 것에서 반환점을 훨씬 돌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삶의 마디를 잘라 그 나이테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굵고 선명해진 선들이 띠를 두른 나이에 이르렀다. 교화 연륜마저 10년이라는 능선을 넘었건만 발밑조차 다지지 못한 상황이라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이래저래 정돈되지 못한 삶의 흔적들이 읽지 않은 책들만큼이나 수북히 쌓인 듯 해 한동안 자책의 시간을 가진다.
여기저기 집적대기만 하고 완성되지 못한 일들 또한 마음 밖에서 나뒹군다. 하지만 그런 완성되지 못한 시간들을 살면서 내가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기웃대며, 나 혼자 뒤떨어진다는 불안함과 조급한 마음만 절실했을 뿐 정작 내가 거둬야 할 결실이 무엇인지 잊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나답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란 걸 알게 되었다.
삶의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생기는 여백이 상실의 시간이 아니라 언젠가는 귀한 경험으로 만나는 소실점이 되리라는 것을......
조급할수록 더디지는 것이 많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이 많다. 열매와 잎을 떨구어 낸 나무가 가벼워 보인다. 매끈해진 가지와 가지 사이의 빈 공간으로 하늘이 더 잘 보인다.
도량에 흐드러지게 핀 국화가 오고가는 발걸음에 향기를 뿌린다. 쌓인 책들은 지금부터 읽으면 되고, 마음의 번잡함은 덜어내면 된다. 속 뜰의 가을걷이가 다만 풍요롭기를 바란다.
그 날, 감을 딴 것이 아니라 인생 가을을 딴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