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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 노란 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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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8-01 15:39 조회2,7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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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외제 승용차,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된 일가족 세 명의 시신이 그것이다. 세상에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겠냐만, 마음이 아프다 못해 분노마저 느껴지는 건 부모의 극단적 선택에 희생된 열 살 어린 소녀의 죽음이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의 마지막 선택은 얼마나 절절했을 것인가. 게다가 사랑으로 낳아 기른 자녀마저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하게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그 마음의 지옥은 얼마나 뜨거웠으며 또 얼마나 고심 참담했을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은 자살을 결심하고 세상에 남겨질 네 아이를 위해 마지막 저녁밥을 지었다. 가난한 살림과 모진 시집살이, 불화를 몰고 다니는 동기간, 그리고 그 모든 걸 더한 것보다도 몇 배 더 참담한-밖으로만 돌면서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남편에 대한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서.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고, 목구멍까지 터져 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으며 집을 나서려는데 서너 살 된 막내가 치마꼬리에 매달리더란다. 어미를 떨어지면 한시도 못 사는 줄 아는 이 어린 것을…하는 마음에 막내를 업고 강으로 향하는 길, 처음엔 엄마 등에서 신바람을 내던 막내가 어스름이 내려앉은 괴괴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칭얼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엄마랑 같이 죽자는 말에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나는 죽기 싫다고, 무섭다고, 집에 가자고 울며불며 아우성을 치더란다. 사는 게 무언지, 죽는게 무언지도 모를 막내의 몸부림에 내가 지금 무슨 죄를 지으려는 건가 싶어서 머리카락이 쭈뼛 솟았다는 그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옥문 앞이더라는 그녀는 수십 년이 흘러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날 그 이야기를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내 어머니였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기록은 둘째 치고 통계청 발표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인구 10만 명 당 25.1명, 연간 12,9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여자의 자살 동기가 모든 연령대에서 정신적 어려움으로 나타난 데 비해 10~20대 남자는 정신적 어려움, 30~50대는 경제적 어려움, 60대 이상은 육체적 어려움으로 조사됐다.

마음 아픈 일이긴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런선택을 하기까지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하고 두려웠을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것 같은 외로움은 얼마나 컸을 것이며, 남겨진 많은 것들을 향한 미련과 미안함은 또 얼마나 절절했을까. 그러나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럴 용기로 살아야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동반 자살이라는 미명 하에 가족 모두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은 어떤 말로도 미화될 수도 없고, 용서받아서도 안 될 일이다. 특히나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어린 자녀의 생명을 꺾는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냐는 온정적인 시각도 거두어져야 한다. 자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속卑屬 살해는 자녀의 인권을 무시한 아동 학대이자, 남겨진 자녀의 불행한 삶을 막기 위해 책임을 다하겠다는 일방적 선의로 포장된 살인 행위일 뿐이다.


 10여 년간 치매 아버지를 돌보던 아들이 어쨌네…, 전신불수 아내를 홀로 간병하던 구순 노인이 저쨌네…,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목숨을 빼앗는 존속尊屬 살해 역시 천륜을 거스르는 범죄이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또한 살인행위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살 배경은 질병을 동반한 생활고나 경제적 어려움, 신병 비관, 가족 간의 갈등이 대부분이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노부모나 배우자 간병에 지친 자식이나 어느 한쪽 배우자가 낙담과 절망 끝에 선택하는 동반자살도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발등의 불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건이 알려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에 동정과 연민을 보낸다. 부모(또는 자식)의 위기가 곧 가족 전체의 위기가 된다는 무의식적인 공감이 부모(또는 자식)의 그릇된 선택에 엄중한 잣대를 내려놓게 한다. 가족에 대한 부양책임을 다할 수 없을 때, 죽음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잠재적인 동의가 불러온 온정적 사회적 분위기가 범죄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사는 데 어찌 봄날만 있을까. 맑은 날이 있으면 폭풍우 몰아치는 날도 있고, 꽃 피는 날이 있으면 홍수나 폭설에 발이 묶이는 날도 있다. 나의 삶도 굽이굽이,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을 만큼 지난한 시절이 있었고, 시련에 좌절한 채 세상을 등진 친구와 이별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딱 그만큼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길도 돌아보면 어느새 아스라이 멀어져 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해 주는 건 딱 그만큼, 견딜 만큼의 고통인 것도 같다.


 그러니 부디…, 존재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생명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극단적 선택을 강요당하고, 끝내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현실의 벽에 부딪쳐 부서지고 으깨진 몸과 마음을 다잡아 일으켜 자신을 바로 세우고 온 힘을 다해 가족의 안위安危를 두루 지켜낼 수 있기를. 애써 가꾼 꽃을 잘라버리는 어리석음 대신 뼈를 깎는 인고忍苦의 시간 앞에 몸을 낮추고 『입보리행론』에 담긴 인연의 소중함을 차근차근 짚어 보기를.


 수천의 생을 반복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드물다.

그러니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라.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약한 자에게는 절망이 장애물이지만 강한 자에게는 징검다리’라는 말을 남긴 영국의 역사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4년 만에 완성한 「프랑스 혁명」의 원고가 하녀의 실수로 잿더미가 되자 크게 좌절했다. 하지만 공들여 쌓은 담장에서 허점을 발견한 벽돌공들이 미련없이 그것을 무너뜨린 후 처음부터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올리는 모습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초고보다 더 훌륭한 원고를 완성했다고 한다.


 절망을 징검다리로 승화시킨 칼라일처럼 진정한 용기는 절망 앞에 쉽게 자신을 내던지거나 죽음을 선택하는 비겁한 용기가 아니라 고난과 맞서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일 것이다. 때로는 노란 신호등도 필요하다. 더도 말고 딱 한 걸음만 멈추고 돌아보자. 험난한 길을 함께 걸어준 아름다운 인연들이 거기 있지 않은가. 가시덤불 사이에서도, 벼랑 끝 바위 틈새에서도, 잡초 우거진 비탈에서도 더불어 피고 지는 꽃-누군가가 그리도 염원했던 내일을 사는 우리는 열 번 스무 번 그렇게 다시 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