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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선성취 | 장자의 죽음과 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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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2-14 14:43 조회3,1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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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난 것은 소멸하며, 모인 것은 흩어진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태어난 것은 죽음을 맞이한다. 일체의 만물은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며,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러한 이치를 불교에서는 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과 연()이 서로 결합하여 생겨난 모든 현상은 이 무상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장자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에도 무상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 장자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제자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나의 관으로 삼을 것이다. 해와 달은 나를 호위하는 한 쌍의 구슬이 될 것이며 혹성과 별무리들이 내 둘레에서 보석으로 빛날 것이다. 만물이 내 장례에 조문객으로 나를 맞이할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것은 두루 돌보아진다.”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는 까마귀와 솔개들이 스승님의 시신을 쪼아 먹을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 땅 위에 있으면 나는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에서는 개미와 벌레들에게 먹힐 것이다. 어느 경우든 나는 먹힐 것이다. 그러니 왜 그대들은 새에게 먹히는 경우만 생각하는가?”

 

장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벌써 시체 치울 생각을 하고 있다. 전혀 있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걱정하는 것이 인간들이다. 지금 한사람의 도인이 삶의 절정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그런 인간이 지금 삶의 절대 순수지점에 다가가고 있다. 그 아름답고 위대한 순간에 제자들은 아무도 제대로 눈을 뜨고 있지 못하다. 장자는 존재에 관심이 있다. 제자들은 행위에 관심이 있다. 인간은 계획하는 것에 미쳐있다. 우리는 삶을 계획하고 죽음까지도 계획한다. 계획을 통해서 자연스러움은 사라진다.

 

삶과 죽음은 둘 다 좋은 것이다. 삶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죽음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해결하려든다. 자연에는 문제가 없다. 별들도 하늘도 나무도 폭풍도 아무 문제가 없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나무가 그를 창조한 자를 몰라 고민하는 것 보았는가? 강물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 그들은 목적지도 묻지 않는다. 그것을 묻는다면 강은 더 이상 흐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김없이 바다에 이른다. 나무와 강물도 도달하는데 왜 인간은 아닌가? ‘그것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라.’ 이것이 장자의 철학 도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두루 돌보아진다. 그것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장자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 말이다. 이 말에는 무상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결국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장자는 말한다. “우리는 삶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듯이 죽음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솔개한테 먹히든, 벌레에게 먹히든 자연의 이치대로 내버려두라. 선택하지 말라. 그것은 삶을 조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 역시 조작하지 말라.” 우리는 우주법계에 육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우주법계가 알아서 내 육체를 만들어 세상에 내 놓았다. 따라서 육체를 해체하는 것도 우주법계가 알아서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을 보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죽은 것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것도 보존할 수 없다. 이것이 무상의 이치다. 장자는 말한다. “나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존재의 법이다. 존재는 하나의 자유이다. 삶이 그 자체로 자유이게 하라. 그러면 그대는 더 높이 성장한다. 그대는 다른 존재와도 하늘과 별과도 교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