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 삼륜청정과 무재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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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2-14 14:28 조회3,59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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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시를 실천하는 데에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삼륜공적(三輪空寂)이라고도 하는데 보시를 하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 그리고 보시물에 집착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이러한 사람에게 보시했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보시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보시의 실천자세로 보고 있습니다. 즉 보시하는 당사자와 보시를 받는 대상, 그리고 보시물이라는 이 삼륜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잘난 사람이 이렇게 좋은 물건을 가지고 저런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고 의식하게 되면 거기에 분별과 집착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번뇌를 가져 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보시의 본래 목적인 탐심을 제거하여 번뇌를 없애려는 것과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 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독선과 오만한 마음을 기르게 되어 또 다른 괴로움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보시를 한다는 생각도, 어떤 물건을 가지고 보시한다는 생각도,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는 당사자도 깨끗한 마음으로 해야 하지만 보시물도 청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훔쳐온 물건이나 부정한 물건을 보시해서는 복이 되지 않습니다.
‘빈녀(貧女)의 일등(一燈)’이라는 경전의 이야기는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난한 여인이 마지막 남은 한 닢의 동전으로 부처님을 위해 등불을 밝혔더니 새벽까지 타고도 일부러 끄려 해도 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보시는 재물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깃들고 정성이 깃든 보시물이라야 공덕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지혜를 가지고 적절한 대상에게 보시를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보시가 보시 받는 자의 의뢰심을 길러주고 게으름과 기대심리만 키워주어 자립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도리어 악업을 짓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보시의 태도는 삼륜청정의 집착 없는 보시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시의 완성인 보시바라밀입니다.
참된 보시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재물에 의한 보시라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첫째는 보시를 행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며 다음으로는 반드시 재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을 도우며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보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법시나 무외시와 같은 정신적인 보시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고 신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몸을 던져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보시는 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이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혹은 자기의 몸으로써 봉사하는 것이든 모두 보시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이타행이 보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재(無財)의 칠시(七施)’라고 하여 물질이 아니더라도 보시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 7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안시(眼施)라는 것입니다. 따뜻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서 눈의 표정에 의한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해서 사나운 눈빛 보다는 온화하고 사랑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표정에 의한 보시가 될 수 있는데 사람을 대해서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것도 보시로써 권장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언어시(言語施)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에 의한 보시로서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쓰지 않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여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신시(身施)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신시와는 약간 다른 것으로서, 상대에 대해 존경하고 예의를 갖춘 태도를 보여서 상대방을 즐겁고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서 몸으로 하는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시(心施)가 있습니다. 착한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보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안시나 화안열색시, 언어시, 신시 등은 모두 착한 마음인 심시가 바탕이 되어야 나올 수 있는 보시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얼굴을 하고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착한 마음이 없으면 모두 겉으로 꾸며서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참된 보시가 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음으로 상좌시(床座施)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리를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자기의 지위가 정해진다고 생각해서 자리 지키는 것에 연연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편안하고 좋은 자리를 남에게 권하는 것이 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사시(房舍施)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잠자리를 남에게 보시하는 것인데, 현대생활에서는 실천하기가 좀 어려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자기의 잠자리를 남에게 주지 않더라도 어려운 사람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는 것도 넓은 의미의 방사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재물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이러한 무재의 칠시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보시만 잘 하여도 미래에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보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기뻐하기만 해도 공덕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재시를 하려고 해도 재물도 없고 몸으로 보시를 하려고 해도 거동이 불편해서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이 보시하는 것을 보면 따라서 기뻐하는 것만으로도 보시의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수희공덕(隨喜功德)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수희공덕은 실제로 보시하는 것과 공덕이 같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같이 따라서 기뻐한다는 것은 언뜻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선행을 보고 입으로는 칭찬해도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자기도 그 정도의 보시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행을 그까짓 것쯤이야 하면서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보시행위를 보고 진정으로 기뻐한다면 그것도 보시와 마찬가지의 공덕이 있다는 것이 마음을 중시하는 불교의 보시에 대한 입장입니다.
이와 같이 보면 보시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모든 행위가 보시가 됩니다. 보시할 물건이나 재물이 없으면 웃는 얼굴 하나만으로도 보시가 되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도 보시가 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같이 기뻐하기만 해도 보시가 됩니다. 보시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재물의 많고 적음, 또는 사회의 기여도가 크다, 작다하는 것으로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보시를 하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떠냐가 더 중요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대사에게 수양제가 자기는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세웠는데 그 공덕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달마대사가 “무(無)”라고 대답했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즉 보시를 하고 나는 보시를 많이 했다고 자만하는 그 마음은 벌써 보시의 공덕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시를 하는 것은 마음의 탐욕과 집착을 버림으로써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참된 보시는 이러한 생각을 모두 떠나고 그야말로 삼륜청정의 보시를 해야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지혜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보시한 것이 다른 사람의 악행을 돕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지혜가 없는 보시가 될 것입니다. 복의 씨를 뿌려도 복 밭에 뿌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삼륜청정의 보시를 하면서도 지혜를 갖춘 보시가 바로 보시의 완성이라고 하는 보시바라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재가자의 보시는 이러한 보시를 궁극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의 실천 방도로서 보시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참된 불자가 되려면 보시도 중요하지만 먼저 불교의 진리를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언젠가 마하남이라는 제자가 부처님께 재가자의 완전한 지혜는 어떤 것이냐고 여쭈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사성제의 진리를 진실 그대로 아는 것이 완전한 지혜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성제는 이와 같이 불교의 실천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고, 사성제의 완성은 곧 불도의 완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에 대해서도 강조를 하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참된 재가불자란 삼보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계율을 준수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삼보를 공경하고 보시에 힘쓰며 사성제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참된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